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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이 일을 주도한 그는 앞장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서 군중을
이끌고 동지들과 함께 몽둥이를 휘두르며 선장면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투석전을 전개하고 유리창 등을
부수며 투쟁했다. 그러다가 총을 쏘며 진압에 나선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공주 형무소에 수
감되었으며 그 해 5월 12일 공주 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
에 불복하여 공소한 뒤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지만 9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다시 공주 형무소
에 수감되어 옥고와 신병으로 고생하다 만기 출소했다.
그는 일제의 억압과 감시 속에서도 독립의 의지를 굳건히 하면서 천도교 활동을 계속했다. 1926년에 순
종황제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온양에서 체포되어 다시 혹독한 고문을 당
하고 풀려났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더욱 가혹해진 1938년(무인년)에 천도교의 무인 멸왜기도(滅倭祈
禱)운동에 참가했다. 다시 경찰에 체포된 그는 온양경찰서에 구금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신병을 얻고 13일
만에 풀려났다. 중·일 전쟁에 몰두하던 일제는 천도교에서 조직적으로 추진한 이 사건이 크게 확대되는
것을 꺼려서 재판도 진행하지 않고 체포된 사람들을 석방했다. 이후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지내다가 8.15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에도 천도교 정비를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1975년 3월 10일에는 천도교 대표 49인의 한 사람으
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촉구하는‘을묘통일선언’
에 참여했다. 그는 자주독립운동에 헌신하였음에도 이
를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정부의 포상을 사양한 채 1979년에 향년 85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숭고한 공
을 기려 정부에서는 헌법에 의거해서 1980년 8월 14일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광복절을 맞아 건
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묘소는 아산시 선장면 군덕3리 선영에 있으며 1983년에 묘비를 세웠다.
<정규희(정수길)>
<기미독립·무인멸왜운동 기념탑>
[50] 정우풍
鄭雨豊
<1879 ~ 1956>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염치읍 방현리에 살던 사람으로 1917년 7월 장두환(張斗煥)의 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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