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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에 있는 항일민족운동 단체 권업회(勸業會)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했다. 학행과 문장으로 이름이 올랐고
《오륜행실록》
《만고감(萬古鑑)》
《훈몽격언(訓蒙格言)》등의 저서와 문집으로《흠재집(欽齋集)》
을 남겼다.
[47] 임천근
林千根
<1890. 6. 7 ~ 1965. 5.30 >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다. 일명 화철(化喆)이며 선장면 군덕리(본적은 장곶리) 사람이다. 3·1운
동이 전개되던 1919년 4월 4일에 선장면(仙掌面) 장터에서 정수길(丁壽吉)·서몽조(徐夢祚)·오상근(吳
相根)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이 날 그는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200여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주재소로 달려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투석하는 등 격렬히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이 해 6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
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48] 임형선
林炯善
<1921. 5.27 ~ ? >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신창면 오목리 사람이다. 예산공립농업학교 재학 중이던 1938년 8월
에 예산읍 소재 그의 하숙집에서 당시 경기상업학교에 다니던 성백우(成百愚)와 만나 항일투쟁을 벌이기
로 결의했다. 1940년 3월에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간 그는 목사가 되어 민중계몽에 앞장 설 것을 결심했
으나 신학교의 입학이 여의치 않자 이듬해 4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동양대학(東洋大學) 예과(豫科)에
입학했다. 그러나 6월에 자퇴하고 귀향한 후 성백우 등과 함께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이 활동의 일환으로
아산군의 신창금융조합에서 근무하다가 1941년 12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3년 3월에 전주지방
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계속 항일운동을 전
개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예심을 받던 중에 해방을 맞이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
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49] 정규희
丁奎熙
<1895. 1. 3 ~ 1979. 5. 23>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본관은 나주(羅州)로 건섭(建燮-일명 태영<泰榮>)의 아들이다. 자는
수길(壽吉) 호는 규암(奎菴)이다. 예산군 대술면 이치리의 빈곤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2년부터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부모를 따라 아산시 선장면 군덕리로 이주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1907년 천
도교(天道敎)에 입교했고 이듬해에 신창 사립 신민(新民)학교에 입학해서 신학문을 익혔다. 가풍에 따라
충의와 애국정신이 투철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각지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호응하여 김천봉(金千鳳)·서몽조(徐
蒙祚)·임천근(林千根)·오상근(吳相根) 등과 결의하여 4월 4일 선장 장날을 택하여 200여 명의 군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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