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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지역학으로서의예산학의지속가능성검토
이중 호락논쟁은 외암 이간과 남당 한원진에게서 심화되었는데, 바로
인성과 물성이서로 다르다는 한원진의 주장은 윤봉구와 최징후로연결
되어 ‘호론(湖論)’으로 지칭되었고. 옥병계로 상징되는 가야구곡(伽耶九曲
: 觀魚臺, 玉屛溪, 濕雲泉, 石門潭, 暎花潭, 卓錫川, 臥龍潭, 孤雲壁, 玉梁瀑)
이바로병계윤봉구의유서가어린곳이다. 한편조선후기덕산은실학
자성호이익(李瀷)의 학문이계승 발전한거점이다. 이익의 숙부이명진
이 혼인으로 덕산에 거주하면서 이익의 친형인 이침(李沈)이 양자로 후
사를잇게되고이후이용휴, 이병휴, 이삼환등이성호의학문을계승하
여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4) 예산은 천주교 전파에도 큰 영향을 미친 곳으로 여사울(예산군 신
암면 신종리) 사람 이존창(李存昌)에 의해 1784년 조직된 여사울 신앙공
동체가 유명하며 이에 의하여 내포지역에는 천주교 신앙이 급속 전파되
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이존창은체포되었다. 공주감영에이
송되어 형을 받은 이존창은 풀려나 홍산, 금산, 고산(전라도)로 거주를
옮겨가며 활동하다가1795년고산에서 다시체포되어1802년공주 황새
바위에서 순교하였다. 이존창은 ‘내포의 사도’로 칭해진다. 가야사 터와
남연군묘 도굴 사건도 예산의 상징적인 유적지이다. 가야사는 대원군에
의하여 폐사되었으나 ‘금탑(金塔)’이 있었다는 자리에 남연군의 묘가 있
다. 오페르트의 도굴사건으로 천주교 병인대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예산 지역은 항일운동도 활발하였다. 덕산 출신의 윤봉길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며, 예산 출신의 독립운동가로서는 이남규(李南珪,
1855-1907)와 김한종(金漢鍾, 1883-1921)도 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항거하는 1919년 3.1운동의 봉기에도 예산은 적극적이었다. 3월 3일 내
포지역에서는처음으로예산읍내에서만세운동이시작되었고3월13일
에는 대흥보통학교 학생들이 시장으로 나가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후
1932년예산농업학교를중심으로한항일비밀결사운동조직이드러나
가담자들이 실형을 받았고, 신간회 운동의 지부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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