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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邑內, 거변居邊, 원동遠東, 근동近東, 외북外北, 내북內北, 일남一南, 이남二南의 8개 면을
관할하였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예산군에 편입되어 읍내 근동의 두 개 면을 합
하여 대흥면으로, 일남?이남의 두 개 면을 합하여 광시면으로, 원동?거변의 두 개
면을 합하여 신양면으로, 내북?외북의 두 개 면을 합하여 봉산(응봉)면으로 되었다.
덕산군의 연혁●●●
본래 백제의 금물현今物懸으로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금무今武로 고쳐서 이산군伊山郡
의 관할이 되었다. 고려 초에 덕풍德豊으로 고치고, 제8대 현종 9년(1018)에 운주에 딸
리었다가 제19대 명종 때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 제3대 태종 5년(1405)에 이산伊山으로, 13년(1413)에 예조에 의하여 현감이 되었
다. 제24대 헌종 13년(1847)에 군이 되어, 장촌場村 대조지大鳥旨, 대덕산大德山, 나박소羅朴
所, 현내懸內, 내야內也, 외야外也, 도용道用, 고현내古縣內, 고산高山, 거등居等, 비방곶菲方串
의 12개면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예산군에 편입되어 현내, 나박소
의 2면이 합하여 덕산면으로 대덕산, 대조지, 장촌의 3면이 합하여 삽교면으로, 도용,
고현내(일부), 거동, 고산의 4면이 합하여 고덕면으로 내야, 외야의 2면과 고현내면 일부
를 합하여 봉산면으로 되고, 오가면과 신암면의 일부지역도 되었다. (이상 예산 군지)
예산군의 역사적 기록은 지나칠 만큼 간명하다. 위의 기록이 전부인 셈이다. 삼국
시대의 다른 기록으로 대흥면의 백제부흥운동의 본거지인 임존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예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었을 가장 큰 사건이다. 그런데 이는 이미 천녀
이상 흐른 옛 기록일 뿐이다.
예산군의 역사가 이렇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예산 땅을 지키고 살아 온 사람들이 평
온한 삶을 살아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역사가 기록하
지 않은 일들로 사람을 어렵게 한 일이 없는 고장은 없을 것이다. 소소한 왜구의 침
탈도 있었을 것이고 현대사의 비극인 일제 강점기의 고통이나 한국 전쟁의 아픔마저
빗겨나간 고장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역사적 아픔 속에서도 특별히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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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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