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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로나마 북벌을 거론했다는 사실조차 세상
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단 한 번도 공식적으
로 혹은 공개적으로 북벌을 거론한 적조차 없는
효종이 과연 북벌을 추진했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병자호란 이후의 역대 임금 중에서 청나라
에 가장 협조적이었던 인물은 다름 아닌 효종이
었다. 청나라의 나선 정벌(러시아 정벌)을 위해
2차례나 군대를 파견한 주인공은 바로 효종이었다.
청나라에 가장 협조적이었던 왕이 북벌의 대명사로
서울시 송파구에 있는 삼전도비
거론되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인조의 항복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비석이다.
효종이 실제로는 북벌을 추진하지 않았다고 하
여,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인들이 청나라에 무조건 굴복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무덤 주변의 신도비에
명나라 연호를 표기함으로써, 또 청나라를 야만시하는 소중화주의를 천명함으로써, 또한 청나라와의 국경문
제(예컨대 백두산정계비 문제) 등에서 강경 입장을 취함으로써 비록 제한적이나마 청나라 앞에서 당당해지
고자 노력했다. 실제로 병자호란의 사례만 제외하면 조선-청나라 관계는 그렇게 치욕스럽지도 않았다. 광서
5년 7월 4일자(1879.8.21) 청나라 광서제의 황명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조선은 형식적으로는 청나라에
사대의 예를 갖추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내치?외교에서 독립국가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사실 이것은 청나라
입장에서도 부득이한 일이었다. 병자호란 이후에 명나라에 이어 중국대륙을 차지한 뒤로 청나라는 조선뿐만
아니라 사방의 적들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타 지역의 안보에도 신경을 쓰자면 어떻게든 조선과 좋은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청나라 관계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병자호란의 치욕은 아주 예외적인 것에 불과했다.
조선은 북벌을 추진하지는 않았지만 청나라 앞에서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비록 우리
마음에 완벽하게 흡족하지는 않겠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나라의 독립과 위신을 유지하려 했던 조상들의
노력이 결코 헛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글쓴이 소개
김 종 성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동양사 전공 박사수료
?삼성경제연구소 Sericeo
‘한국사 인물통찰’강의 중
?오마이뉴스‘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연재 중
12 |
2011_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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