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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강학년
姜鶴年
<1585(선조 18년) ~ 1647(인조 25년)>
조선 중기의 은일(隱逸)·문신·학자이다. 본관은 진주로 참판을 지낸 명신 첨(籤)의 아들이며 대전 대
덕구 회덕 출신이다. 외가가 있는 서천 한산에서 태어나 13세 때 고향인 회덕으로 돌아가서 살았다. 자는
자구(子久), 호는 복천(復泉)이다. 25세 때인 1609년(광해군 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병이 많아서 출사
하지 아니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광해군 말년에는 정치 문란과 부친상으로 농사를 지으며 숨어 살았다.
인조반정(1623) 후 학행(學行)으로 최명길이 천거하여 연기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피난할 때에 천안으로 가서 왕을 맞이했다. 이때 진천현감이 되었으나 두
달 만에 다시 돌아왔다가 이듬해 세자익위사 사어(司御-종5품)가 되었다. 그 후 성균관사예·사업, 사헌
부 지평·장령을 역임하였다. 1627년 후금 침입 때 조정에서 화의를 논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 오랑캐와 화의할 수 없음을 상소하였다. 또 1643년(인조 21) 장령이 되었을 때 반정공신들에 의한
폐단을 상소하였다가 파직되어 이듬해 은진으로 귀양 가서 1년 만에 본가로 돌아온 후 1647년(인조 25)
63세로 세상을 마쳤다. 1654년(효종5) 특진관 홍명하(洪命夏)의 상소로 신원되었고 후에 이조판서에 증
직되었다. 일생 동안 청빈하였고 의를 내세워 선비들의 추앙을 받아 회덕 용호사에 배향되었다. 묘는 아
산시 탕정면 매곡리에 있다.
[11] 강호
姜鎬
<1605(선조 38년) ∼ 1667(현종 8년)>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다. 조부는 대사헌·대사간을 지낸 첨(籤)이고 부친은 장령을 지
내고 이조참의에 증직된 강학년(姜鶴年)이다. 자는 경숙(京叔)이다. 전남 화순(和順)에서 출생했고 서울에
서 살았다. 1635년(인조 13) 증광 생원시 3등에 합격했고 1642년(인조 20)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했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문학(文學)을 역임하고 정언·지평(持平)·찰방·교리·장령(掌令)을 지
냈다. 1655년 1월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헌납이 되었다. 1657년(효종 8) 12월 세자시강원 필선
(弼善)에 전직하였다. 이듬해부터 다시 장령·필선·헌납 등을 거쳐 길주목사(吉州牧使)에 발탁되었다.
1668년(현종 9) 승지(承旨)가 되고 이듬해 원양도
(原壤道-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1671년(현종 12)
부부와 둘째 아들이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 후에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 춘추관 성균
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증직되었다. 독서와 수
행에 힘썼고 특히 주역(周易)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인동과 양양의 수령 재임시 선정으로 청정비가 세워
졌다. 묘는 아산시 송악면 동화리 분토골에 있다.
<강호의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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