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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은 새 곡식이 수확되는 월 양력
9 (
10 )
월 이 오기를 기다려 재궐기하기로 하고 각도의 동학 접주들
에게 통문을 띄웠다 드디어 월
9
13 (
일 양력
10
11 )
일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광주에서 재기포하
여 삼례역으로 향하였다 김재남은 월 일 남원에서 재기포하여 전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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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보은에 대도소를 두고있던 동학의 제 세 교주 최시형은 종교적인 입장을 고수하여 처음에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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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 투쟁에 가담하기를 꺼려해서 남접의 무장 봉기에 반대했었다 그러나 여러 접주들의 권고를 받은 오
지영
吳知泳
등의 조정 노력이 성공하여 항일 구국 투쟁이라는 대의와 급박해진 나라의 형편 앞에 대동
단결하게 되었다 그 결과 최시형이 지도하는 북접도 무장 봉기하여 손병희의 지휘하에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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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명의 북
접동학 농민군이 청산에 집결하게 되었다.
정부측은 이에 당황하여 신정희
申正熙
를 양호순무사
兩湖巡撫使
로 임명하여 관군을 추가로 남하시켰
다 그러나 조선군은 일본군이 월
6
21 (
일 양력 월
7
23 )
일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무장 해제를 당한 후 크게
약화되어 있었고 얼마 되지 않은 조선군은 이름만 남아 있을 뿐 실제로는 일본군의 지휘 감독하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므로 일본군도 조선군을 신뢰하지 않고 스스로 일본이 주동이 되어 동학 농
민군을
진압 하겠다고 나섰다 일본측은 청일 전쟁에 파견된 부대의 잔류대 이외에 순전히 동학 농
민군을
토벌 하기 위한 부대를 파견해 줄 것을 일본군 대본영에 요청하여 독립보병
獨立步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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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가 급파되었다.
관군 일본군 남하경로
동학군이 한창 번성하여 그 무리가 몇 만명에 이르러 동에서 번쩍하여 서쪽으로 사라지며 흩어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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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모여들고 하였다 그리하여 순무영을 설치하고 서울에 있는 병사와 충청도 전라도의 병영에 있는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에 나섰으나 중과부적으로 그 세를 당해 낼 도리가 없어 부득이 일본공사 이노우
井上馨
에 일본군을 파병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미 일본군을 파송하였다
일본군은 동 중 서 삼로
三路
로 나누어 공주를 목표로 남하하였다 동로 병첨선 제 중대 송본
1
松本
소위 장호원 경유 중로 청주 공주 제 중대 석흑
3
石黑
대위 양지 경유 서로 제 중대 삼미
2
三尾
위 진위 경유 일본군이 통과하는 여로의 수령들은 이들을 영접하는데 퍽 까다로웠다
. 10
15 (
일 신시
시 용산을 출발한 일본군이 과천에서 밤을 지내는 가운데 과천현이 접대가 소홀했다하여 관아의 서리
들을 현의 옥에 가둔 일도 있었다.
편저 박상건
唐津文化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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