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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효자 정해열의 효행이다. 예산 고덕면 상몽리에 그의 효자 정문이 있다. 정해열은
상 곁을 지키며 시중을 들었다.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자 자신의 허벅다리를 베어내어 약에
어려서부터 덕행이 남다르고 힘을 다해 어버이를 섬겼다. 일곱 살에 어머님이 병이 들자 정
섞어 달여 드렸고, 손가락을 깨물어 자신의 피를 입에 넣어 드리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효행
성껏 약탕을 올리고 잠시도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다. 또한 어느 날 어머니가 잉어와 미나
으로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그의 아들인 김치화 역시 그의 아버지인 김방언과 다름없
리를 드시고 싶어 하자 추운 겨울에 얼음을 깨고 미나리를 캐자 잉어 서너 마리가 강에서 뛰
이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는 부친인 김방언의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시묘하면서 산소를 돌보
어 올라서 잉어와 미나리를 어머니에게 봉양하였다. 친척과 이웃들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화
며 효성을 다하였다. 1783년에 조정에서 양세정려비를 내려 부자의 효성을 널리 알렸다.
목하게 지냈다.
다음은 효자 최승립(崔承立)의 효행이다. 예산 광시면 노전리에 최승립의 효자 정문이
다음은 효자 조극선(趙克善, 1595~1658)의 효행이다. 예산 봉산면 시동리에 조극선 효
있었는데, 1812년(순조 10)에 이전하여 지금은 충남 청양군 대치면 농소리(農所里)에 있다.
자 정문이 있다. 조극선은 문신으로 1648년(인조 26) 온양군수를 지냈다. 효종 때 장령에 올
최승립은 조선 현종 때 사람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봄마다 보릿고개를 당하여 곡식을 얻기
랐으며 효행으로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야곡집』, 『야곡삼관기』가 있다. 묘는
위해 품앗이를 다녔다. 어머니가 병이 들자 어렵게 약을 구해 드렸으나 차도가 없었다. 어느
예산군 봉산면 시동리(侍洞里) 안시무골마을에 있다. 묘 주변에 신도비, 효자문, 어제각(御
겨울날 의원이 어머니의 병에 뱀이 좋다고 하자, 그는 뱀을 찾아 산을 헤메다가 어느 돌무덤
製閣)이 있고, 어제각 안에는 친필어제가 보관되어 있다. 조극선은 부친이 외출하였다가 집
에 쓰러졌다. 그가 간절하게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리자, 갑자기 뱀이 나타나 이 뱀을 잡아와
에 올 시간이 되면 지금 비석이 서 있는 곳에 항상 와서 기다렸다가 부친을 모시고 집으로
어머니에게 드시게 하여 병이 나았다고 한다. 또 아버지가 병이 들자 잉어가 좋다는 말을 듣
돌아갔다고 한다. 어느 날 부친이 덕산 현감과 함께 늦은 밤까지 담소를 하다가 비가 내리
고 추운 겨울날 연못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자 얼음이 녹고 잉어가 튀어 올라 이것을 잡아 아
자, 밤도 늦었고 비도 오니 자고 갈 것을 현감이 권하였으나 그의 부친은 자식이 밖에서 돌
버지에게 드시게 하니 아버지도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에 조정에서 효자 정문을 내렸다.
아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므로 가기를 강행하자 현감이 확인해 보자고 따라 나섰다. 현감이
다음은 효자 정학수의 효행이다. 예산 신앙면 시왕리에는 정학수를 기리는 효자 정문이
쫓아가 보니 조극선이 그 늦은 밤까지 냇가에서 비를 맞으며 부친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
있다. 정학수는 고종 대에 대사헌까지 지냈다. 그는 부모를 모시기 위해 정성을 다하고 친지
다. 이를 들은 현감이 조정에 이 사실을 알려, 효자정려 문을 세웠다.
와 화목하게 지냈다. 어버이가 병이 들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입에 넣어 드려 부
다음은 효자 차명증 · 경증 형제의 효행이다. 예산 신양면 서계양리에 차명증 · 차경증
모의 수명을 연장하였다고 한다. 부친상을 당하자 죽만 먹으며 3년상을 치루었고 흰옷을 입
형제의 효자 정문이 있다. 차명증은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가 병이 들자 어머니 생명을 연
고 지냈다. 이후에도 매일 무덤을 살피고 늙어서도 그치지 않았다. 1870년에 충청도 관찰사
장시키려고 세 번이나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피를 어머니 입에 넣어 드렸다. 아버지가 병이
의 교지로 효자문을 세웠다.
들자 또 그렇게 하여 양쪽 손가락이 모두 온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아우 차경증이 울
다음은 효자 김창조의 효행이다. 예산 고덕면 몽곡리에 김창조의 효자 정문이 있다. 그는
면서 “형님께서 손가락을 모두 잘랐는데 아우만이 완전한 손가락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순조 때인 1819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 섬기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고 도리를 벗어나
하면서 자신도 그렇게 했다. 상을 당하자 산소에 여막을 지어 시묘했다. 그가 꿇어앉았던
지 않는 삶을 살았다. 그는 아버지가 병이 들자 지극한 효를 다하고자 하였고, 병 상태를 알
곳에는 땅이 오목하게 파이고 산소 곁에 샘물이 솟아올라 그 당시의 사람들이 이 우물을 효
기 위해 직접 아버지의 변 맛을 보기도 하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입에 흘려 넣
자천이라고 불렀다.
어가며 효성으로 지극히 간병하였다. 그의 정직한 삶과 효행을 본 사람들은 그를 칭송하고
다음은 효자 김방언과 그의 아들 김치화의 효행이다. 예산 광시면 신흥리에 김방언과 김
조정에 알려, 조정에서는 1881년에 효자정려문을 하사하였다.
치화를 기리는 ‘양세정려문’이 있다. 김방언은 1693년에 출생하였으며 그는 효자로서 어릴
다음은 효자 최필현의 효행이다. 예산 신양면에 최필현(崔弼賢) 효자 정문이 있다. 최필
때부터 부모님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이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드렸으며, 아버님 병환에 항
현은 조선 숙종 때 사람으로 자는 정포(正浦)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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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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