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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전속되었다가 다시 제2연대 제1대대에 배속되었다. 그 해 7월 31일에 일제의 강요로 대한제국 군대해
산 칙령이 내려졌고 이튿날인 8월 1일에 훈련원에서 해산식을 강행하여 해산을 단행하였다. 일제의 조치
에 대해 분개하던 군인들은 이 날 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의 자결을 계기로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해서 병
영을 장악하고 시가전을 전개했다. 이 후 지방 진위대의 해산 과정에서도 곳곳에서 항쟁이 일어났고 해산
군인들은 의병에 가담하기도 했지만 그는 첫날(8월 1일) 전투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45] 이학승
李學承
<1852(철종 3년) ~ 1894(고종 31년)>
조선 말기의 무신이다. 아산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全
州)고 쌍호당 단석(端錫)의 6세손이자 병사 응혁(應爀)의
증손자이고 군수 종규(鍾奎)의 아들이다. 자는 경습(景
習)이다. 1874년(고종 11)에 무과에 급제하여 1881년부
터 관직에 나아가서 선전관(宣傳官), 훈련첨정(訓練僉正)
등을 역임했다. 1894년(고종 31)에 동학농민전쟁이 일
어나자 장위영(壯衛營)의 대관(隊官)으로서 양호초토사
(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의 지휘 하에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했다. 선봉장으로 300명을 이끌고
전라도 장성 월평전역(月坪戰役-일명 황룡촌 전투)에서
<이학승의 묘 상석>
싸우다 패하고 전사했다. 곧 좌승지에 추증되고 장충단
(奬忠壇)에 배향되었다. 묘는 아산시 영인면 신현리에 있다. 판서 김학진(金鶴鎭)이 묘지(墓誌)를 찬하고
참판 이면상(李冕相)이 묘갈(墓碣)을 찬했으며 1935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46] 임공렬
任公烈
<1869 ~ 1933>
한말·일제강점기의 학자(유림)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으로 소간공(昭簡公) 유겸(由謙)의 후손이다. 생
부(生父)는 흥재(興宰)이나 지중추부사 홍망(弘望)의 8세손 선교(善敎)의 계자(系子)가 되었다. 자는 성무
(聖武)고 호는 흠재(欽齋)·죽하(竹下)이며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효행이 특별히 뛰어났고 기
개와 지조가 있었다.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이를 격렬히 규탄하는 상소문을 올렸
다. 이로 인해 이듬해에 예산의 유림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가 그를 칭송하고 교유를 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910년 8월에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관료와 지도층을 포섭·회유하기 위해 귀족 작위와
이른바 은사금을 내렸다. 그에게도 은사금이 내려지자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일제는 아산군수 김영진(金
英鎭)을 통해 수령을 독촉하기도 했지만 끝내 받지 않았다. 이후 1912년에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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