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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이일영
李鎰永·鵬海
<1899.5.15~1950.6.28>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자는 공익(公益), 호는 송강(松崗)이다. 본명은 일영이지만 독립운동
당시 붕해(鵬海)·봉기(鳳基) 등 다른 이름을 사용해서 붕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본관은 덕수(德水)로 충
무공의 12세손이며 신창면 황산리(黃山里)에서 의정부 찬정 민승(敏承)의 4남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한학
을 배운 뒤 보통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천안에서 경찰에게 잡혔다가
탈출해서 만주로 망명했다. 남만주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7기생으로 졸업한 후 한국독립연성대에서 6개
월간 교육을 받고 청산리전투에 참가해서 활약했다. 그 후 러시아 자유시로 갔다가 참변(1921년-흑하사
변)을 겪고 만주로 돌아왔다.
이후 중국 본토로 들어가 중국 낙양(洛陽)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로 돌아왔다. 1923년 5월 연길(延
吉)에서 김규식(金奎植)·고평(高平)·이범석(李範奭) 등이 고려혁명군을 편성할 때 참여했다. 동북만주
밀산(密山)·호림(虎林)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중국군과 대항했으며 특히 밀산 공략에 큰 공을
세웠다. 1925년 김좌진(金佐鎭)이 중심이 되어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할 때 참가하여 경비대장에 선임되
었으며 1929년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흑색동맹) 17인위원회 정위원으로 활동했다. 이어 무정부주의
자연맹과 신민부가 합작해서 재만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할 때 군사위원장이 되어 동북만주 일대에서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이 때 부인 최문환(崔文煥)도 부녀부장으로 활동했다. 1930년에 김좌진이 피살되자 그
가 중심이 되어 임시치안대를 조직하고 중동선(中東線) 일대를 방위하는 한편 배후자인 김봉환을 체포·
처단했다. 1932년 한족총연합회 주하지방(珠河地方) 집행위원장이 되어 지하운동을 전개하며 재만 한인
들의 배일사상 고취와 생활 선도에 힘을 기울였다. 1944년 9월 한국광복군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8·15해방 이후에는 광복군의 최용덕(崔用德)·김학규(金學奎) 등과 함께 중국군 및 일본군에 소속되었
던 한인장병을 흡수하여 훈련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오광선(吳光鮮)과 함께 국내지대를 따로 설치하고 참
모장에 취임하여 활약했다. 귀국 후 1946년 김구(金九)가 주도하는 한국독립당의 중앙감찰위원회 사찰부
장·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국군에 입대해서 1949년 제주도병사구사령관(濟州道兵
事區司令官)을 역임하고 방위군옹진지단(防衛軍甕津支團) 고문단장으로 재직하던 중 6·25전쟁 때 전사
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81년 신창면 득산리 창학산 선영에 단(壇)을 설치하고 이
듬해에 단비를 세웠다.
[44] 이준영
李峻永
<1879. 1. 9 ~ 1907. 8. >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다. 본적은 탕정면 용두리이며 민학(敏學)의 아들이다. 1900년 9월 20일
대한제국군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하고 1901년 3월 4일 육군 보병 참위(參尉)로 임명되어 진위대(鎭衛隊)
제1연대 제1대대에 배속되어 강화도(江華島)에서 근무했다. 1907년 4월 30일 시위보병 제3연대 제1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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