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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에 의해 집강(執綱)으로 임명되었다. 그 해 3월에 전라도에서 1차 봉기가 있었고 9월의 2차 봉기에 이
르러 호서지방 대접주 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의 기포령이 내려졌다. 그는 10월에 신창 지역 접주 김경
삼(金敬三)·곽완(郭玩)·정태영(丁泰榮) 등과 함께 온양·아산·신창 일대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
했다. 그는 신례원 창소리에서 예산 지방 동학농민군과 합류한 뒤 10월 28일 홍주성 공략에 참여했다. 그
러나 홍주성 점령에 실패하고 이어 일본군과 관군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신창(新昌) 접주(接主)였던 그는 이 때 부상을 입고 붙잡혀 홍주목사로서 초토사(招討使)였던 이승우(李
勝宇)에 의해 덕산 접주 최동신(崔東臣), 면천 접주 이창구(李昌九) 등과 함께 홍주성 동문 밖에서 참살(斬
殺) 당했다. 시신을 찾지 못해서 묘소가 없다. 이후 관군과 지방 토호들의 보복이 극심하게 전개되었다.
그의 가족도 재산을 몰수당하고 오랫동안 도피와 은둔 생활을 했다.
한편 그의 동생 순교(順敎, 1860~1928)는 별집강(別執綱)으로 형 신교(信敎)와 함께 홍주성 전투에 참
가했으나 다행히 붙잡히지 않고 도피한 뒤 광덕산과 공주 유구 지역 산간에 은신하며 지냈다. 긴급한 상
황이 가라앉은 뒤에는 인근 유구, 예산, 온양, 아산 등지에서 포교 활동을 지속하다가 1928년에 생을 마
감했다. 그러나 이들 형제의 투철한 민족정신과 동학(천도교)의 맥은 끊어지지 않고 손자 한구(漢求)에게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42] 이애라
李愛羅
<1894. 1. 7~1922. 9. 4>
아산과 관련된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일명 심숙·앨라·애일라(愛日羅)라고도 한다. 시종 이춘식의 셋
째 딸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그 학교 교사로 재직 중 20세 때에 아산 출신의 독립운
동가인 이규갑(李奎甲)과 결혼한 후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에서 근무했다. 1917년 평양 정의(正義)여학
교에 전근되어 근무하던 중, 1919년 3·1독립만세시위에 가담해서 평양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남편
을 돕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온 그는 한남수(韓南洙)·김사국(金思國)·홍면희(洪冕熹)·이규갑(李奎甲)
등이 비밀리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국민대회를 소집하는데 참여하여 활동했다. 이 때 그는 아기를
업고 동분서주했는데 아현동(阿峴洞)에서 경찰에게 몸수색을 당하게 되자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아기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떨치고 달아났다. 화가 난 경찰이 내던져서 아기가 죽었는데 애국부인회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남편이 상해로 간 4월 이후에 그는 임시정부를 뒷받침하기 위한 여성 조직인 애국부인회에 참가해서 아
산·공주·수원 등지의 교회를 다니면서 모금 운동을 전개하고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맡는 등 중심적
역할을 감당했다. 1921년 천안 양대(良垈)여학교 교사로 재직 중 경찰의 압박이 심해지자 간도로 탈출해
서 항일 운동을 계속했다. 이듬해에 밀서를 가지고 국내로 들어오다가 함경북도 웅기에서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 끝에 순국했다. 영인면 월선리에 있는 충국순의비에 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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