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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용흥(聖祖龍興) 소명(召命)하였으나 공은 맹세코 죽어도 응하지 아니하였다. 태조가 그
뜻을 빼앗기 어려움을 알고 불신지례(不臣之禮)로 대하여 구항의 한 구역을 혜양의 자비(資備)
로 하사 하였다. 공이 기묘년 향년 팔십사세에 졸(卒)하여 결성 상서면 능동 임좌에 장사지
내고 부인은 진주강씨로 노위례(魯衛禮)에 장사지내고 삼남 삼녀를 낳으니 정승 중로 전서
계로 참의 혜로은 아들이요. 전서 금거도 군수 박교 부사 송우는 사위이다. 인부윤(仁府尹)
유의 수찬 유례 목사 유지는 찬성장방(贊成長房)이며 유온(有溫)은 참의(參議) 유량(有良)은 응교
(應敎) 유공(有恭)은 생원(生員) 유검(有儉)은 현감이니 차남의 자손이요. 옥강(玉綱)은 차남의 손이
다. 집의(執義) 열신(烈臣) 집의 원진(遠 ). 정검(晶 ) 교신(交信)은 효손이고 현획린간의첨정(賢
獲麟侃義僉正) 영주 석환은 공의 증손이다. 현손 이하는 복잡하고 번거롭게 다 기록하지 않고
다만 세상에 문장으로 현달한 자 중에 증좌윤 취모참찬 진정랑은 열신의 후손이다. 대인(代
仁)은 청난원종공신 원진의 후손. 의눌 진사 가순은 증참의 교신의 후손이며 효충이라. 증
집의 수기(守紀)는 현감 영주의 후손이라. 공은 금세에 이미 오백여년이 지나 문헌이 산실되
어 실로 기송(杞宋)하였다. 오직 공이 조정에 나아가 직언하는 위풍과 나라는 망하였어도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조는 가히 역사에 근거하고 보첩에 기록된 한 두가지만 알뿐이다.
공의대략여기에있으니어찌자세하게다권하지못한것이애석하지않겠는가?
오호라 사대부가 마땅히 국가의 혁명할 때에 나라의 걱정을 다하고 뜻을 펴지 못한 즉
차라리 뒤돌아보지 않고 은둔하여 황망한 아픔을 참고 원통함을 머금고 관직의 녹을 사양
했다. 위무를 굽히지 않고 종신토록 한결같이 여일(如一)하였으니 공이 나아간 바가 이것이
아니겠는가? 후손 정한(鼎漢) 덕진(德鎭)이 나를 내알(來謁)하여 표목의 기둥이 될 만한 명문을
부탁하니 끝내 사양할 수 없어 이에 명을 지어 이르기를 고려의 마지막 왕이 혼미하여 정
치를 어지럽게 하니 아! 오직 공이 충의 강직하여 조정에 나아가 넓게 구국하려 하였으나
이문정공과 옳은 말로 하였으나 유배지에 귀양 갔으며 아홉 번 죽어도 휘가 없고 그 뜻을
꺾이지않고몇번이고벼슬을파직하고의관이훼손되었다.
스스로 해산(海山)의 험곡에 두문불출 하였으니 공은 생의 낙이 아니었다. 성조(이태조)가
불렀으나 굳게 절의를 지키고 벼슬을 잊어버렸다. 드디어 그 뜻을 보고 성덕과 백성이 감
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공은 고려의 한 지역에 거하니 매 일월 군신의 의(義)를 밝게하고 강
136_홍성의금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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