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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처음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사마방목(司馬榜目)》
에는 장남인 채응복이 25세 때
합격한 숙종25년(1699)의 생원진사시 때 거주지가 아산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 채응복이 장남이라는
점, 아우들도 둘이 더 들어왔던 점 등으로 보아 아버지인 채봉장 때 들어온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사유는 불명확하나 어떤 사정으로 인해 근거지였던 경기도 양주를 떠나게 되었다. 아버지 채시경의
묘는 경기도 양평에 있다. 채봉장은 아들의 혼인을 계기로 아산 지역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신정아주지에는 그가 홍성 결성(結城)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남 채응복과 삼남 채응정이 모두
안산김씨 집안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채응복의 부인은 안산김씨(安山金氏) 동지중추부
사 김시환(金始煥)의 딸이다. 김시환은 안산김씨 아산시 배방읍 휴대리 지역 입향조인 모기재(慕箕
齋) 김필(金珌)의 5세손이다.
큰아들 채응복(1675~1744)은 문과급제 후 외직을 거쳐 세자시강원 보덕과 사헌부 집의를 역임하
였다. 후손들은‘보덕공’
으로 칭한다. 부인 안산김씨 사이에 3남을 두었고 후손들이 천안 풍세면 삼
태리 인근에 자리 잡았다.
둘째아들 채응록과 후손들은 천안 백석동을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셋째아들 채응정(1685~1754)은 염치읍 대동리 황골 마을에 자리 잡았다. 부인 안산김씨 김두찬(金
斗燦)의 딸 사이에 광하(匡夏), 성하(成夏), 정하(廷夏) 등 아들 셋을 두었다. 이 중 채정하는 문과급제
후 호조참판 등을 거쳐 지돈녕부사에 오르고 기로소에 들어 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아버지인 채
응정도 자헌대부 호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아산시 지역은 주로 셋째아들 채응정의 후손이 중심이 되
어 이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넷째아들 채응상은 천안 지역에 터를 닦았다. 아들 위하(緯夏)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후손 채동교 효자 정려와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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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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