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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이민화
李敏華
<1898. 1. 13 ~ 1923. 9. 13>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염치읍 방현리 사람으로 약관의 나이에 나라를 되찾고자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1917년 12월에 간도(間島)로 망명했다.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한 뒤 무장투쟁단체인 서로군정
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여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범석 등과 함께
1919년에는 북간도에서 김좌진(金佐鎭)·서일(徐一)·김성(金星) 등을 도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조직
에 참여했다. 사관훈련소를 설치하여 군사 훈련에 전념하고 사관훈련소 졸업생들로 구성한 연성대(練成
隊) 종군대장을 맡아 김 훈(金勳)·이탁(李鐸)·남익(南益) 등과 함께 활발히 활동했다. 이듬해인 1920년
10월에는 북로군정서군 지휘관(중대장, 종군대장)으로 전설적인 청산리 독립전쟁에 참전했다. 만주 화룡
현 삼도구 천수동(泉水洞)과 마록구(馬鹿溝)·십리평(十里平)·숭의구(崇義溝)·삼분구(三 口) 등지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10여 차례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일본군의 보복(간도참변)을 피해 러시아령 자유
시(自由市-스보보드니)로 이동하기 위해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 밀산현(密山縣)에 집결했다. 서일(徐一)을 총재
로 하는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으로 통합되자 박영
(朴榮)과 함께 북로군정서 대표로 참가해서 활동하며 자
유시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듬해(1921년) 6월에 그 곳에
서 이른바 자유시참변(흑하사변)의 참혹한 시련을 겪은
뒤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만주로 돌아오다가 러·중
접경 지역인 밀산에서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중국인 토
병(土兵-민병)의 공격을 받고 교전하다 안타깝게 전사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며 1963년에 건국
<이민화의 묘>
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41] 이신교
李信敎
< 1840 ~ 1894 >
온양 출신의 동학지도자이다. 본관은 전주(全州)로 온양 용화리에서 거주했으며 일찍이 동학에 입교했
다. 그의 처남 이규호(李圭鎬)는 당진 신평에서 살다가 자형(姉兄)이 있는 온양 용화리로 왔는데 1884년
11월에 온양면 용화리의 이규호 부부가 입교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도 이미 그 즈음에는 동학
에 입교했을 것으로 본다. 그 후 그는 온양은 물론 아산현, 신창현 일대에서 포교 활동을 전개했고 1892
년 초부터 시작된 교조신원운동 중 1892년 10월의 공주집회와 1893년 3월 보은집회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1894년 1월에 동학의 2대 교주이자 북접 대도주인 해월 최시형(崔時亨) 신사(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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