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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충남학 특강 - 조선조의 법제도와 규범문화
의 국가권력은 집요하게 유교적 질서체계를 세우려 노력하게 되고 그것은 우선 『주자가례』를 뿌리내
해 공인되고 있었던 셈이다.
11)
법 없이 유지되던 신기한 사회는 이렇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
리려는 시책으로 시작되었다. 조정에서는 삼강오륜의 내용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이를 그림으로 그
방의 유림들은 지방장관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공적 사적관계의 뚜렷한 구별 없이 향약을 통
려서 일반 백성들에게 주지시키려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학』의 행위범절이나 관혼상제로 대표
한 형벌권을 행사했으니 이는 향약의 자치권이 국가권력의 연장선 위에서 있었음을 의미한다. 국가
되는 주자가례를 보급하려는 국가권력의 노력이 아무리 경주된다 해도 유구하게 내려온 전통적 습
권력에 의한 법 집행에 큰 조력자가 자발적으로 구축된 것이다. 이 또한 반도에 사는 백성들의 법적
속을 하루아침에 변화시키기 어려웠던 것은 그것이 잡초만큼 집요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 이
사고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였다.
예禮는 자율적 준수를 기대하는 규범이니 이는 인간에 대한 상호간의 신뢰를 토대로 한다. 이에
건국 후 200여 년이 지나 성리학적 논의가 심화되면서 성리학자들에 의해 전국 곳곳에서 시행된
반해 실정법규범은 인간의 부정적 측면을 전제로 하고 있으니 인간에 대한 불신 위에 기초하고 있
향약을 통해 유교적 규범관, 즉 보다 정확하게는 성리학적 규범관은 이 땅에 비로소 뿌리내릴 수
다. 성리학이 극성을 부리던 조선조 후기 모든 백성들이 성리학적 규범윤리로 무장되어 이를 지키
있는 장치를 완비하게 된다. 한반도 방방곡곡에서 사대부들에 의해 시행된 향약은 철저하게 마을
고 추구하던 당시에 법에 의해 형벌을 집행 받는 경우는 물론이고 법정에 서는 것조차 엄청난 수치
백성들을 성리학적 규범질서로 이끌고 갔다. 이제는 절에서 부모의 제례를 올리며 그것도 자식들이
로 여겨졌다. 법은 그만큼 불명예스런 장치로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성문법전이 전혀 쓸모없게
돌아가며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자가례에 의해 적장자가 제사를 모셔야 하며 종법제에 의해 종족
된 것은 아니다. 예법을 지키는 정도 여부가 신분에 따라 달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성문
간의 관계를 확실히 하고 공동체 의식을 공고히 하기 위해 족보가 만들어 졌다.
10)
남녀칠세부동석·
법전이 기능할 수 있는 여지는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끊임없이 법전이 보완되고 정비되어 갔다.
12)

칠거지악·삼불거·관존민비·남존여비·적서차별·적장자우선·처첩차별·정절 등의 원칙들을 목숨보
간사회는 어디나 마찬가지이듯이 조선시대에도 수많은 범죄가 발생했고 또한 어떤 식으로든 처리할
다 더 중히 지켜야 되는 규범관도 본격적으로 정착되었다. 17-8세기에 꽃을 피운 예학禮學 시대에
수 있는 준거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에 잇닿아 있는 전 시대의 법문화는 이처럼 도덕적 예
는 사돈의 팔촌의 아내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를 논의할 만큼 예에 관한 연구는 깊이를 더해갔다.
규범 질서의 넓다란 호수 위에 떠있는 섬처럼 법질서를 받아들인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실로 한반도 전역에 성리학적 질서관이 뿌리내려 결코 넘볼 수 없을 만큼 신분계급제도가 확실하게
정립되고 어려서부터 『소학』의 행위범절을 몸에 익혀 일체의 관계는 예에 의해 행해야 하며 예를 어
5.전통사회에서형률과소송
길 경우 심한 수치심을 느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도록 교화되어졌다.
물론 이러한 엄격한 생활태도가 조선반도의 모든 백성들에게 요구된 것이 아니라 양반계층에 한
정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제도상 평민과 엄격히 구별되는 신분을 지녔음에도 수 천 년 내려온 한민
전통사회에서 모든 사건은 민사 형사를 가리지 않고 사건 그 자체로서 처리하려했다. 오늘날 형
족 특유의 평등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어서 이들의 삶의 모습은 그대로 일반 평민들의 삶에 지대
사사건을 민사사건과 구별해야하는 이유는 형법을 국가권력에 대한 규제원리로서 피의자를 보호하
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물론 향약도 일종의 계모임 같은 것이라서 당연히 양반계층에 한정된 일
는 장치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사회는 국가권력을 도덕성을 갖춘 경우에만 정당한 국가권
종의 행위약속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촌장을 중심으로 공동체적 삶을 살아온 수 천 년의 생활사는
력으로 여긴다는 전제가 서 있기 때문에 형률을 굳이 국가권력에 대한 제한원리로 보아야할 이유가
신분의 구별을 넘어선 동질적인 생활상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결국 향약의 조목들은 향리사람들
없었다. 그러므로 형률의 조항이 적어야 좋은 법이라고 여길 필요도 없었고 굳이 민사와 형사를 구
모두의 생활지침이 되어간 것이다. 이제는 전국 곳곳에서 대부분의 사소한 범법행위는 향약을 통해
별할 필요도 없었다. 물론 성격상 순수한 민사사건의 경우와 형사사건의 경우를 처리하면서 형성된
자체적으로 처리되었다. 사적 단체에 의한 형사처벌이라고도 볼 수 있는 사형私刑이 국가권력에 의
11) 이를테면 이율곡의 「社倉契約束」에 의하면 하인을 상벌에 처 했을 시 태형 40을 치게 되어있다. 이재룡, 『조선, 예의 사
상에서 법의 통치까지』, 230쪽, 예문서원, 1995 
10) 연구에 의하면 성리학자들의 이와 같은 집요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적장자 우선의 상속제도와 장자의 봉제사상속, 족보
12) 주지하듯이 조선왕조는 전 시대에 걸쳐 수많은 법전이 만들어 졌다. 『경국대전』을 근본 법전으로 삼아 시대의 변화를
에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화 등의 통상적인 유교적 사회현상은 16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8세기에 이르러 일반적인 사회
받아들여 당시의 사회구조에 맡는 규범원리를 찾아내어 수정 보완해 나간 것이다. 『속대전』, 『대전속록』, 『전율통보』,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한다. 이재룡 호주제도 그 역사적 법철학적 당부, 오늘의 동양사상 10호, 2004년 봄호 69
『전록통고』, 『수교집록』, 『대전통편』등을 거쳐 『대전회통』에 이르기 까지 방대한 법규정들이 정리되어 수정 보완되어 시
쪽. 예문 동양사상연구원 
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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