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369페이지

135페이지 본문시작

어 떠나가오.”라고 하여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 각국에 보여주었으며, 나라를 사랑하는
기려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현재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에 박인
애국 남아의 기개를 떨쳤다.
호 선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예산은 김한종 의사, 윤봉길 의사 외에도 일연(一鳶) 신현상(申鉉商, 1905~1950), 천도
이처럼 예산은 구한말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위정척사(衛正斥邪)에 바탕한 민족의식과
교령(天道敎領) 춘암(春庵) 박인호(朴寅浩, 1855~1940) 등 민족 독립을 위해 활동한 많은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정신을 발휘하는 애국지사를 배출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국가와
독립 투사들이 나왔다.
민족이 일제 침략을 당하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충의 정신을 발휘했다. 충의
신현상은 일명 신현정(申鉉鼎)이다. 1929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민당(民黨) 요원으
정신은 스스로 맡은 직분에 최선과 충실을 다하고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숭고한 정신
로 임시정부 군자금 조달의 지령을 받고 국내로 잠입하여, 고향인 예산에서 최석영(崔錫榮)
이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충절지사들의 의거와 애국지사들의 희생으로 국난을 극복하였고,
을 포섭한 뒤 천안 호서은행(湖西銀行) 지점에서 5만 8000원을 빼앗았다. 그해 북경 · 상해
일제강점기의 호국 선열의 충절을 통하여 민족 자주정신을 이어갔다. 이들 애국지사들이 나
· 톈진 등을 돌면서 독립운동가에게 군자금을 나누어주었다. 다음 해인 1930년 3월 5일 유
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 땅에 면면히 흐르는
기석(劉基錫)과 함께 톈진 일본영사관을 습격하려고 무기를 구하다가 일경에 잡혀 공주형
충의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소에서 5년 동안 감금되었다.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박인호는 예산의 하포리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다가 1883년에 충북 목천에 머무르
3.효행으로이름난인물들
던 최시형을 찾아가 동학에 입교했다. 이후 포교 활동에 매진하여 수천 명의 교인과 십여 개
의 포를 관할하는 대두목으로 성장했다. 교조 최제우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벌
일 때, 박인호는 1893년 2월 소두(疏頭) 박광호, 제소(製疏) 손천민, 서사(書寫) 남홍원, 봉
충남은 전 지역이 많은 효자 효녀 열녀를 배출한 고장이지만, 예산 역시 어느 고장 못지
소(奉疏)인 손병희 · 김연국 · 박덕칠 등과 함께 봉소로서 활동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
않은 효자 효녀가 많이 나온 고장으로 효 문화가 생생하게 전해오는 고장이다. 예산의 이름
동이 전개되었을 때, 박인호는 제2차 봉기 시 기포(起包)하였다. 1894년 10월 말 홍주성 전
난 효자로는 강만채 · 강만구 형제, 김구, 김방언 · 김치화 부자, 김창조, 이규, 이성만 · 이순
투에서 패한 후, 박인호는 도피하여 숨어 지냈다. 3년 뒤 1897년에 박인호는 최시형을 찾아
형제, 이우영, 이후직, 인영원 부부, 전근금, 정학수, 정해열, 조극선, 차명증 · 차경증 형제,
갔고, 손병희를 스승으로 삼았다. 1898년에 최시형이 체포되자 박인호는 최시형 구명 활동
최승립, 최필현 등 수많은 효자가 나왔다.
을 벌였으며, 최시형이 교형 당하자 그 유해를 수습하기도 했다. 1901년 이후 손병희가 일
먼저 예산에서 가장 유명한 효자 이야기는 이성만(李成萬) 형제의 효행이다. 예산 대흥
본에 망명하여 문명개화운동을 추진하자, 박인호는 손병희의 심복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면 동서리에 ‘볏단을 나르는 의좋은 형제’ 이야기로 유명한 이성만 · 이순 형제의 효제비(孝
悌碑)가 있다. 대흥(大興) 호장(戶長)이었던 형 이성만과 아우 이순은 한 마을에 살면서 농
수행하였다. 손병희의 지시로 1904년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하고, 10월 초에는 진보회(進
步會)를 조직하여 흑의단발(黑衣斷髮)을 하고 갑진개화운동을 전개하는 등 천도교 사업에
사를 함께 지었고 가을에 추수를 하자 두 형제는 똑같이 볏단을 나누었다. 그날 밤, 형은 새
헌신하였다. 1908년에 박인호는 4세 대도주에 임명되었다. 3·1운동 때 손병희를 도와 독립
살림을 차린 아우가 생활비가 더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볏단을 동생 쪽 볏단에 갖
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당시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이다. 이 일로 체포되어 2년간 서대
다가 올려놓았다. 동생도 형 집의 식구가 더 많으니 양식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볏단을
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 후 박인호는 천도교의 대도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날라 형님 쪽 볏단 위에 올려놓았다. 이튿날 아침에 형과 아우는 양쪽이 똑같은 볏단을 발견
의 활동을 비밀리에 후원하기도 하고, 1936년 8월 14일 지일기념일에 교회 지도자들에게
하고 다음 날 밤에 또 다시 형은 동생에게 아우는 형에게 자기 볏단을 나르다가 서로를 발견
일제 패망을 재촉하는 기도를 올리게 하는 등 애국운동에 매진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 20, 대흥현조). 이성만 형제 효제
3.선비의고장,예산
135
134
내포의뿌리예산학

135페이지 본문끝



현재 포커스의 아래내용들은 동일한 컨텐츠를 가지고 페이지넘김 효과및 시각적 효과를 제공하는 페이지이므로 스크린리더 사용자는 여기까지만 낭독하시고 위의 페이지이동 링크를 사용하여 다음페이지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상단메뉴 바로가기 단축키안내 : 이전페이지는 좌측방향키, 다음페이지는 우측방향키, 첫페이지는 상단방향키, 마지막페이지는 하단방향키, 좌측확대축소는 insert키, 우측확대축소는 delete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