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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學奎)가 이끄는 제3지대 제1구 대원으로 훈련을 받았다. 특히 미군과의 연합 활동 방편으로 미군 통역
병으로 활동하기 위해 동남아로 출동을 준비하던 중에 광복을 맞이했다. 귀국 후 주로 부산에서 거주하였
으며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 부인 황원희 사이에 5녀를 두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37] 이달용
李達鎔
<1889. 2. 3 ~ 1919. 3. 18 >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다. 염치읍 강청리 사람으로 1919년 3월 18일 밤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和
道面) 마석모루(磨石隅)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만세시위를 준비하다가 체포된 이재하(李載夏)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헌병 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중에 일본 헌병이
총격을 가하여 그를 비롯하여 4명이 현장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1년
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38] 이민학
李敏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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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출신의 한말 의병이다. 본적은 탕정면 용두리이고 본관은 덕수(德水)다. 대한제국 군인이던 그의
아들 준영(峻永, 1879~1907)이 1907년에 군대 해산 명령을 거부하며 싸우다가 서울에서 순국하자 비분
강개하여 1908년 2월 17일에 지방의 동지를 규합하여 예산 방면에서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09년 9월 10일 체포되어 예산군 광시면 은사리 주를 마을의 참나무 정자 아래에서 동지 9명과 함께 집
단 총살을 당했다고 한다.
[39] 이민호
李敏浩
<1895. 4. 7 ~ 1944. 3. 16>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본적은 탕정면 매곡리이고 본관은 덕수(德水)로 독립운동가 규풍(奎
豊)과 오세라(吳세라) 사이의 장남이다. 그는 경성의전(京城醫專)을 졸업하고 1919년 3·1만세운동 당시
황해도 일부 및 전라·충청도를 돌아다니며 청년들을 모아 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추진·지휘하고 서울
로 돌아오던 중에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平壤) 형무소에서 3년의 옥고를 치렀다.
만기 출옥 후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1922년 가족을 동반하고 연해주로 망명해서 아버지 규풍
(奎豊)과 만나 온 가족이 함께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다시 만주(滿洲)로 들어가 신민부(新民府) 부원으로
활동하다가 아버지가 사망하자 북경(北京)으로 가서 지하공작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장처명(張處明) 등
과 함께 체포되었다. 일제의 고문으로 인해 사경에 이르게 되자 가석방되어 병원에 입원했으나 끝내 순국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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