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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로 보면 300년은 너무 길다.)
여양진씨 대동보에 따르면 그의 고조부는 사직을 지낸 진우신(陳又新), 증조부는 증자헌대부 진유
(陳維), 조부는 통덕랑 진홍립(陳弘立)이다. 아버지는 진하(陳
, 1627~1657)이고 어머니는 광산김
씨(光山金氏, 1633~1694)이다. 아버지의 졸년(卒年)과 그의 생년에 착오가 있다. 또한 그의 졸년과
그의 아들 진담(陳譚, 1727~1775)의 생년이 맞지 않는다. 족보에는 계자(系子)라는 기록이 없으니
의문이다. 확인할 방법이 없고 집안에서는 진한호가 처음 들어왔다고 전하고 있음을 참고할 뿐이다.
조선 후기에 농업이 발전하면서 선장면 일대의 갯벌을 간척하여 농토로 만들 때 그도 이 곳으로 들
어와 터를 닦은 것으로 전해진다. 집안에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선장 대정리 지역에 가장 먼저 들어
온 것이 여양진씨 집안이라고 한다.
진한호의 부인은 청주이씨(淸州李氏)이며 외아들 담(譚)을 두었다. 진한호의 묘는 도고면 도고산 줄
기에 있다고 전해지나 현재 찾을 수 없다. 족보에 진담은 환(煥), 욱( ), 구건(九乾), 구범(九範), 구
석(九錫), 구원(九元), 구호(九昊), 의원(儀元) 등의 아들을 둔 것으로 되어 있다. 어쨌든 이후 여양진
씨가 선장을 중심으로 도고, 신창 지역 각지에 퍼지게 되었다.
[140] 연안차씨 차유명
| 車有明
<1654년(효종5년) ~ ? >
조선 후기의 인물로 연안차씨(延安車氏) 31세이며 오산공파(五山公派) 아산시 지역, 신창면 신달리
입향조이다. 현재 영인면 신운리에 살고 있는 후손 42세(世) 차준기(車濬基, 73세)씨의 11대조이다.
고조는 문과에 두 차례 급제하고 봉상시 첨정을 지냈으며 시문에 뛰어나‘송도삼절(松都三絶)’
‘동
방문사(東方文士)’
로 일컬어졌던 차천로(車天輅, 1556∼1615)이다. 차천로의 호는 오산(五山)으로
오산공파의 파조가 되며‘아산팔문장(牙山八文章)’
에 들어 있으나 아산과의 관련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증조는 문과급제 후 양산군수 등을 지낸 차전곤(車轉坤, 1586~?)이고 조부는 진사 차후재
(車後載, 1604~1676)이다. 아버지는 차세장(車世章, ?~?)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사과(司果) 이
응식(李膺植)의 딸이다.
차유명은 삼남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는 선지(善之)이다. 부인은 한양조씨(漢陽趙氏)이다. 그
가 언제 어떤 사유로 신창으로 들어왔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시기는 대략 330년 전으로 추정한다.
묘는 곡교천 건너인 인주면 냉정리 악항(岳項)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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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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