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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경(추정) 가족을 두고 노령(露領-러시아령, 주로 연해주)에 가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1908년
(융희 2) 연해주에서 이범윤(李範允)·안중근(安重根)·김두성(金斗星) 등과 함께 300명의 의병부대를 편
성하여 두만강 근처 노브키에프스크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을 전개했다. 주로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하여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 부대, 이어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격파하는 등 큰 전과를 거뒀지만 일본군의
기습으로 회령전투에서 패배한 뒤 의병부대를 해체하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1909년 1월에는
안중근 등과 함께 12명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고 국권회복의 의지를 더욱 다졌다. 해삼위(海蔘
威-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군 기지로서 한국인들의 집단 거주지 신한촌(新韓村) 건설에 참여했다.
1910년 8월에 일제의 국권강탈 소식이 전해지자 이범윤 등 많은 지도자들과 함께 성명회(聲明會)를 조직
하고 최초로 합방 반대 선언서를 발표·배포하는 한편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인들을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러시아 당국에 의해 지도부 42명이 체포되고 그를 포함해서 8명이 이르쿠츠크로 유형(流刑)을 당해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후 임시정부 수립에 관여해서 서울로 들어갔다. 4월 23일 한성정부(漢城政府) 수립을
선포했던 국민대회에서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평정관(評定官)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3월 민족유일당(좌우합작) 운동의 일환으로 만주 길림(吉林)에서 민족혁신파 대표대
회가 열리자 최소수(崔素水)·주진수(朱鎭壽) 등과 함께 노령 대표로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정의부(正義
府)의 양기탁(梁起鐸)·오동진(吳東振)·고활신(高豁信)·현정경(玄正卿)·곽종대(郭鍾大) 등과 천도교 혁
신파인 김봉국(金鳳國)·이동락(李東洛),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송헌(宋憲), 그리고 러시아
지역 공산주의자로 그와 최소수(崔素水)·주진수(朱鎭秀) 등과 4월 5일에 정치 정당으로 고려혁명당(高麗
革命黨)을 조직하고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 해
(1926년) 말 지도부와 조직원들 여럿이 일제 경찰에 체
포되고 내부 사상 분열로 인해 와해되었다. 이 후 잠시
만주 길림성의 소수분(小綏芬)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연
해주로 넘어가 세상을 뜰 때까지 항일 활동을 계속했다.
그의 아들 민호(敏浩), 손자(민호의 아들) 길영(吉永) 역
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전개했
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충국순의 비>
[36] 이길영
李吉永
<1928. 4. 4 ~ 2007. 11. 10>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본관은 덕수(德水)로 연해주의 독립운동가 규풍(奎豊, 1865~1932)
의 손자이자 중국에서 활약한 민호(敏浩, 1895~1944)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독립
운동에 대한 투철한 신념을 갖게 된 그는 18세 되던 1945년 3월에 한국광복군에 자진 입대해서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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