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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4월 19일에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으로 선출되었다. 7월에는 의정원의 청원위
원(請願委員)이 되어 국채통칙(國債通則) 및 공채발행조
례(公債發行條例)를 통과시키는 등 의정원 활동에 전념
했다. 한편 상해한인청년단(上海韓人靑年團)의 서무부장
겸 비서부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지속시키는 데 공헌했
다. 이후 형 규풍이 있는 만·소 국경 지역에 가서 가족
들의 독립군 활동에 참여했다가 귀국한다. 국내에서 안
재홍(安在鴻)·조병옥(趙炳玉)·홍명희(洪命熹) 등이
1927년에 조직한 신간회(新幹會) 활동에 동참했다.
<이규갑의 묘>
1929년 7월 20일 신간회 경동지회(京東支會) 집행위원
장으로 선임되어 민족유일당 운동에 앞장섰다. 1931년 신간회 해체 이후 은둔 생활을 하다가 일제 말기에
이태영 등과 일본 기독교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재무부장으로 활동했으며 좌우 갈등이 심화되자 고향에 돌아와서 머물렀다.
1950년에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문교사회분과위원장을 맡고 윤치영 등과 대한국민당을 조직하여 최
고위원이 되었다. 이후 1952년 순국선열유가족조사위원장, 1956년 충국열사기념사업회장, 1959년 대한
기독교반공위원장 등을 거쳐 1963년에는 민주공화당 고문, 국민외교협의회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정부
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영인면 월선리 응봉산(매
봉) 줄기에 어머니와 형 등 집안의 독립운동과 관련해서 묘역을 정리하고 박정희도 포함된 건비(建碑)위
원회를 만들어 1964년에 충국순의비(忠國殉義碑) 건립을 주도했다. 그의 묘도 월선리에 함께 있다.
[34] 이규남
李圭南
<1862 ~ 1907. 11. 20>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다. 영인 아산리 사람으로 1907년 당시 아산군(牙山郡)에서 서기(書記)로
재직 중이었다. 1907년 11월 16일 의병이 일본군의 아산 분파소(牙山分派所)를 습격할 때 의병과 손을 잡
고 길 안내를 하며 이들의 활동을 도왔다. 이 일로 인하여 11월 20일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인 상강(上
姜)·조전(早田) 순사에 의해 압송되던 중 동생 이규찬(李圭瓚)의 도움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동생과 함
께 피살되어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35] 이규풍
李奎豊
<1865. 11. 2 ~ 1932. 6. 1>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본적은 탕정면 매곡리다. 본관은 덕수(德水)로 절충장군 조빈(肇彬)
의 손자이자 군수 도희(道熙)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밀양 박(朴)씨 생원 준호의 딸 안라이며 서울 묵동에
서 태어났다. 자는 락서, 호는 우풍이며 일명 규목(奎穆)이다. 부인은 해주 오(吳)씨 세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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