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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잊혀진시간을말하다3
마동 앞 갯벌에는 능쟁이와 황발이라는 게가 많았다. 마을에서는 이것을 잡아 젓을 담가
먹었다. 마동 앞 갯벌에서는 낙지도 많이 잡았다. 한상용 씨의 형님은 이곳에서 굴양식을
하기도하였다.
발전소 부지에 살았던 마을은 마동과 한여, 여수해 마을이다. 3마을이 모두 약 20여 호
거주하였고, 1980년대 초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여수해 마을이 제일 먼저 이주하였는데, 많
은 사람들이 당진으로 이주하였고, 다음에 이주한 한여 사람들은 바로 옆에 있는 솟바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솟바리로 이주한 한여 주민들과 마동 주민들은 발전소 부지가 넓어지면
서함께이주하였다.집단이주하지는않았지만,한여주민들은은포리남양군도로많이이
주하였다.
초군계는 초상이 났을 때 상여를 메는 계이다. 마동과 한여는 주교면 고정리, 여수해는
오천면오포리이지만,3마을이모여함께초군계를만든것이다.행정구역과관계없이서로
이웃하기 때문이다. 초상이 나면 초군계원들이 모여 상여를 메는데, 마을마다 돌려가면서
메었다.이번에는마동,다음에는한여,또다음에는여수해이런식이다.상여는보통12명
이메었지만,부잣집에서상이났을경우에는24명도멨다.
한상용 씨는 배를 운영할 때 뱃고사를 지냈다. 배를 새로 사왔을 때와 정월 명절에 지냈
는데 떡을 해서 그냥 배에서 지냈다. 마을에 당집이 없었고, 다른 마을처럼 당집에서 지내
는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배에 5색기(色旗)는 가지고 있었다. 최근 한상용님은 아들이
사온배에오색기를선물하였다.아들은최근어항에서통발어업을시작하였다.
한여·마동·여수해로 통하는 길은 없었다. 주교면 고정리 마을 초입인 동틀까지만 차가
들어오고 이후에는 산길로 걸어 다녔다. 주민들도 힘들었고, 초소에 근무하는 군인들도 힘
들었다. 1976년경 군부대의 힘을 얻어 도로를 만들었다. 이후 한여까지 버스가 들어왔고,
군보급품도한여까지수송되었다.
어느 여름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한여 백사장에 천막을 치고 야영을 하면서 지질조사를
하였다. 주민들은 지질조사하는 것을 보고 발전소가 들어올지 짐작하였다. 보령화력이 들
어선3개마을중에서물이가장좋았던곳은마동마을이다.한여마을이나여수해마을은
물부족으로 고생하지는 않았으나, 물이 썩 좋지 않았다. 반면 마동 마을은 샘물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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