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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내포 지방의 육군 상무사를 중심으로(보부상들의 시장권이 결성과 충주 청양 정
산 예산 대흥 신창 온양 덕산 합덕 당진 해미 서산 태안 오천 보령 남포등)결
성 용호장이 조선 시대는 대표적인 큰 시장으로 장항선에서 가장 큰 쇠전(가축
시장)과 씨름난장이 경상도 대구장 다음으로 크게 성행되었다는 국내에서 손꼽
히는 장이었다고 전해오며 따라서 이곳에서 광대놀이(공연활동)등 이 시장 중심
으로 성황이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8. 또한 문무(文武) 계급차별이 심한 현실에서 예술인의 『광대나 무당 등』의 하대
하는 구습에 젖어 크게 무시당하는 등 지방에서는 천대의 경향이 컸으며 이곳
선비들도 결성 용호리 명창 김창용(金昌用)을 소리꾼 김창옝 라고 속칭해 오고
있다. 그 이름도 많이 남아 있지 않고 지성인층과 대도시에서는 인기가 높은
경향이었다. 일직이 정부에서는 명창들을 국창으로도 많은 벼슬을 하사하여 특
별대우로 연기를 길러 내려왔다.
9. 일제강점기 후에 점차 교통의 발달에 따라 용호장(龍湖市場=용오리 장)이 점점
쇠퇴하여 폐장 무렵 내포 지방 평창들도 발이 넓어지면서 國唱(국창)으로 金(김)
名唱(명창) 가문이 경기도(현 서울 마포 공덕동)로 전 가족이 이사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도 한다.(결성면 사무소 호병계 이환부 계장의 협조로 호적 찾기 완성)
10. 결성의 특별한 인물 김 명창을 늦게 찾아진 큰 이유가 있다.
◇ 1988년부터 소리꾼 결성인 김창용 명창 중심의 호적 찾기에 20여 년 경과했다.
(一) 이사 시 제적부에 호주가 김창용이 아닌 형 김영수로 미발견
(二) 정노식의 朝鮮唱劇史(조선창극사) 등 인물 록에 서천인 이란 오류에 서천
에서 살다가 결성에서 살아왔나? 가정(假定)에 초점을 맞추어 조사가 허사
이었다.
(三) 지방 노인들의 고증에 원래 결성 사람이란 확신 후 1925년 7월 6일자로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공덕리 92번지(高陽郡 龍江面 孔德里 九拾貳 番地,
현 마포 공덕동)에 전 가족이 이사한 사실을 늦게 발견으로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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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향토문화(洪州鄕土文化) 제3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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