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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시보령의바다
한상용 씨의 아버지가 마동 간척지를 만들 때 십장을 한 연유로 좋은 논을 농사지을 수
있었고, 해방 후에는 저수지 밑에 있는 좋은 논을 분배 받았다. 물이 나오는 논이어서 가뭄
에도 걱정이 없었고, 물을 모아 두었다가 윗논으로 퍼 올려 농사를 지었다. 다른 논들은 날
이가물면농사짓기힘들었다.
일제 강점기, 간척지 제방을 만들었어도 전부 논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제방 주변 약 1/3
정도는 황무지로 남아있었다. 이곳에서 한상용 씨의 할아버지가 화렴을 만들어 팔았다. 소
금은 청양장까지 가서 팔았는데, 할아버지가 소금 15말을 지게에 지고, 하고개를 넘어 청
라,화성을지나청양장에까지가서콩15말과바꾸어왔다는이야기가전한다.
한상용씨는군대에가기전에1.5톤정도의주낙배를사서운영하였다.풍선배로돛이2
개였고,노도앞뒤로2개였다.경험이부족하여임영상씨와황영국씨를고용하여함께고기
를 잡았는데 미끼는 송학리 산고래 앞에 맸던 살에서 살아있는 열치를 사다가 사용하였다.
도미를잡으려면살아있는열치를써야만했다.황영국씨는주낙놓는선수였다.잡은고기
는바다에떠있는상고선에팔거나시장에내다팔았다.마동마을의배는마을앞장벌에
정박하였다.송도가방파제처럼파도를막아주어태풍이불어도상관없었다.
마동과 한여 마을은 보령에서 김양식을 일찍 시작한 마을이었다. 마동 마을에서는 마을
앞에서 김양식을 하다가, 송도 동남쪽 바다 목넘어라고 하는 곳으로 옮겨 갔다. 이곳이 넓
고더좋은김을생산할수있기때문이었다.서울에서는고정리김이최고인기였다.
한상용 씨는 약 20떼의 김발을 맸고 온 가족이 달려들어 작업하였다. 어머니가 김 뜨는
기술자였다. 김을 말리는 것이 문제였는데 처음에는 나래를 엮어 건조하는 곳을 만들어 사
용하였으나 나중에는 ‘사시꼬미’라고 하는 틀을 만들어 햇빛을 찾아다니면서 말려 능률을
높였다.
마동앞에는바지락이아주많았다.마동앞에는모래와자갈이섞여바지락이서식하는
데 최적의 조건이어서 바지락이 아주 많았다. 마을에서는 바지락이 많이 나는 곳을 ‘조개
탕’이라고 불렀다. 한상용 씨의 어머니는 80세가 가까워질 때까지 늘 바지락을 잡았다. 마
을에서는바지락을잡으면생으로까서젓을담아팔았다.바지락외에뻘땅에는가무락이
라는검은조개가있었는데상품성이크지않아반찬으로먹는정도였다.팔지는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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