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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충남학 특강 - 조선조의 법제도와 규범문화
화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인간들의 공존조건의 응축물, 그것을 문화라 이름할 때 사회조직과 밀접
되기도 하지만 이상적인 사회구조를 이룩해야한다는 이념적 지표를 스스로 설정해 추구하는 원동
히 연관되는 각종 사회제도도 문화의 중요한 한 측면이 된다. 그 중 법제도가 가장 중요한 사회문화
력이 되기도 한다. 한국인에게 특별히 발달한 감성과 이상향을 추구하는 정신세계의 기묘한 결합
의 한 요소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문화란 대체로 인간의 고집스런 자기 확인의 동인에 의해 그리
은 적법과 불법의 경계를 정확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심성을 심어준다. 한국인들에게 오랜 세월
고 시간적 역사의 큰 강줄기에서 공간적인 공동 운명을 걸머지고 이어져 간다. 법규범이 공동생활
농축되어온 이러한 전통적 가치관은 아직도 우리의 법문화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을 영위하면서 형성되는 상호관계의 유형화된 규범인 한 거기에는 사회구성원의 의식구조와 생활방
이러한 여러 특징들은 한국의 법문화가 분명 독특한 법문화임을 말해준다. 현재 우리의 의식 속에
식 등 물질적 정신적 토대가 중요한 작용을 미치게 마련이다. 한국의 법문화를 논함에 법질서 일반
흐르고 있는 규범의식을 살펴보기 위해 전 시대인 조선시대의 규범문화를 되돌아보는 것은 조선시
에 공통된 보편적 원리보다 문화적 특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대야말로 역사상 가장 강력하게 국가통치이념을 백성들 모두에게 주지시키려 노력한 왕조였기 때문
이다.
조선 왕조가 유교를 국시로 설정한 것은 정치·경제·사회적 제 관계의 변화에 따른 역사적 환경에
2.한국법제도의특성
서 이해해야 한다. 유학의 다양한 입장 중에서도 특히 성리학을 받아들였다는 점에도 역사적 환경
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백성들의 지지를 배경으로 전개된 신흥사대부들의 개혁의 사상적 토대가 당
시의 부패상을 가장 잘 대비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성리학이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3)
고래로 한민족은 동이족 특유의 선민의식과 동족의식이 강한 민족이다. 또한 공동체 의식을 제고
즉 조선왕조는 통치이념을 전면에 내세워 이끌어간 점에서 다른 우리나라 역대 왕조들과는 다른 양
시켜주는 다양한 집단의식은 신분과 계층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조화를 창출하는 장치로 작용했
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에 의해 건국된 조선왕조는 당연히 강력한 성리학적 유교입국을 표방하게
다. 이는 한민족에 유별나게 강한 평등의식이 지속적으로 사회구성 원리로 작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개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더욱 성리학을 뿌리내리려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4)
되었으며 국가와 가족을 분리하지 않고 공동 운명체로 여기는 국가관을 형성하게 했다. 평등의식은
그러나 이러한 통치이념은 천 여 년이 넘게 지속되어온 전통적 사상과 인습 그리고 불교적인 각
남녀관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그 형태가 남아있는 고구려의 데릴사위제도의 사회의
종 습속과의 관계에서 마찰을 빚으며 시행에 진통을 겪게 된다. 법제도는 국가권력이 가장 극명하
식은 남녀는 평등하게 사회를 구성하는 존재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신라사회에서도 여자들은 자
게 행사되는 장치인 만큼 조선왕조가 유교적 통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법제도를 중시했음을 당연
신만의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남녀의식은 고려를 거쳐 조선조 초 중엽까지 이어져오는
한 일이다. 우선 조선왕조가 국시로 삼았던 유교의 규범원리를 간단히 살펴보자.
우리의 훌륭한 규범전통이 되고 있다. 조선조 중엽까지만 해도 여자는 자신만의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심지어 사대부가의 족보에조차 외손녀의 이름이 그대로 등재되는 등 친가와 외가는 물론
남자와 여자의 차별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시집간 딸이 친정아버지의 재산을 균분 상속하는 것은
물론 제사까지 돌아가며 담당했다.
1)
이러한 수평적 사회구조가 극심하게 파괴된 것은 조선조 중 후
기에 극성을 부린 성리학 때문이었다. 성리학은 실로 우리 반만년 역사에 굳건히 이어져온 고유의
정체성을 극도로 전복시켜 새로운 정신세계와 사회관계를 강요한 엄청난 지배장치였다.
2)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은 이상적인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서 현실에 대한 불만과 갈등
3) 麗末에 安珦에 의해 수입된 性理學은 高麗 초기의 原始儒學이나 漢唐儒學과는 성격이 사뭇 달랐다. “원시유학이 효·
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는 여과장치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정신세계는 강렬한 종교성으로 표출
제·충·신 등의 윤리에 중점을 두었고 漢唐 유학은 예악과 형정 등 전장제도와 문장사조를 숭상하였다면, 송대의 성리
학은 원시유학이 탐구했던 심성과 도덕의 문제를 형이상학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려서 한층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측면에
서 그 문제를 궁구하는, 이른바 窮理盡性의 학문이었다.” 고려의 유학은 麗初에 ‘修身’을 불교에 방기하고 유학이 治理之
學에 머물던 데서 나아가 ‘事功’과 ‘義理’를 兼具한 性理學에 이르러서야 ‘內聖外王’·‘修己治人’을 표방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완비하게 되었다. 결국 麗末의 성리학적 유학은 종교·정치·사회·학술·문화·교육 심지어 외교에 이르기까지 유학
의 정신을 발휘해 나가는 衛道主義的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金忠烈 『韓國儒學史』Ⅰ, 358 쪽, 서울 도서출판 예문서원,
1) 이순구 『조선시대 생활사』 중 ‘여성생활’부분참조, 역사비평사, 2002년, “세종이 중외의 신료들에‘어머니가 죽은 후 그 어
1998 
머니에게서 난 한 가족이면서 노비와 재산을 모두 가지려는 욕심에서 출가한 여성에게 분재하기를 꺼리는 자는 엄히 죄
4) 고려의 유학이 성리학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통치의 지침서로 읽히던 貞觀政要에서 大學衍義로 바뀌는 것은(『高麗史節
를 주도록 하라’는 기사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要』 恭讓王 2 년 尹紹宗 進言) 유학이 단순한 통치원리만을 제공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정치·경제·국방 등 총체적인
2) 마르티나 도히힐러,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 128쪽, 이훈상 옮김, 아카넷 2004. 
개혁을 주장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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