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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세상을떠나니,가정13년갑오년11월16일의일이었다.향년47살이다.
167)
예산 종경리 선영 오향의 언덕에 장례를 치르니 치명
을 따른 것이다. 공이 세
상을 떠난 지 57년이 지난 선조대왕 만력 신묘년(1591년) 종계변무의 일로 표
를 올려 비준을 받은 업적으로 광록종훈 일등에 추록(追錄)되어 공에게 이 작위
가추증되었다.
공은 어릴 때부터 벌써 어른처럼 행동해 나이 예닐곱 살에 글을 지을 줄 알
았다.〔석류시〕와〔오작교시〕를 지었는데, 언어가 모두 미묘하여 사람들이 모
두 놀라 기이하게 여겼다. 나이 일곱 살 때 머리에 부스럼이 나 머리카락을 다
깎았는데, 사람들이 머리가 찬바람에 상할까 염려해 담비 모자를 주었지만 사
양하면서“남의 물건은 함부로 받아서는 안 된다.”며 끝내 거절하였다. 이 이야
기를듣고모두놀라고기이하게여기지않는사람이없었다.
공은 중종 시대를 당해 참으로 한 시대에 무거운 명성을 떨쳤지만, 문예는
단지 여기(餘技)로 여겼는데, 사마시에 응시했을 때에는 문필이 모두 뛰어나서
고관이 시권을 읽고는 찬탄하면서‘퇴지(韓愈)의 문장이고 희지(王羲之)의 글
씨’라며 칭송했다. 양과에 모두 장원급제하니 우리 왕조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
다. 필법은 당시 사람들이 서로 흠모하여 본받아 일러 인수체(仁壽體)라 했는
데, 공이 살던 곳이 인수방(仁壽坊)이었던 때문이었다. 진초(眞草)로 남은 글씨
들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데, 종횡으로 모양새가 다양해 스스로 일가를 이
루었으니,참으로세상의진기한보배라고하겠다.
오호라! 공의 문장과 학술은 크게 세상에서도 인정을 받았지만, 항상 문정
168)
공 조광조 선생 등 제현과 훈지
의 관계로 지내면서 바른 학문을 강독하며 세
도(世道)를 되돌리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었다. 그러나 마침내 사림의 재
앙을 만나 여러 해 동안 오지에 버려져 그 뜻을 세상에 펼치지 못했으니 오호
라!안타까운일이로다.
169)
정부인 김해 김씨와 결혼했는데, 좌통례
김귀통이 조부고 만호 김진현
이 아버지다. 집안을 다스리고 음식을 장만하는 데 모두 법식을 지켰으며, 2남
1녀를 낳으니, 첫째가 용(鎔)이나 일찍죽어 후사가 없고, 둘째가 균(鈞)으로 진
167)치명:사람이죽기전정신이멀쩡했을때한유언.
168)훈지: 피리의 일종 훈(壎)은 흙으로,지(?)는 대나무로 만들었다.형이 훈을 아우는 지를불어 서로
조화된음률을이룬다는뜻에서형제가서로화목한것을일컫는다.
169)좌통례:조선시대통례원의정3품직,근시,집례등예식에관한일을관장했다.
130│묵향의본향에서조선4대명필자암김구를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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