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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향되었다. 도산서원은 흥선대원군 때(1871년) 철폐되었는데 풍양조씨 문중에서 지난 2006년에 그
의 묘가 있는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종산에 이전·복원하였다.
조익은 몽양(夢陽), 진양(進陽), 복양(復陽), 내양(來陽), 현양(顯陽) 등 다섯 아들, 이른바‘5양’
두었다. 홍산현감을 지낸 조몽양은 예산 신양, 단양군수를 지낸 조진양은 단양과 서울, 대제학에 오
른 문간공(文簡公) 조복양은 포천과 논산과 수원, 생원 조현양은 수원 지역으로 후손들이 이어졌다.
넷째아들인 조내양은 도고산 아래에 살았기 때문에 호가 도산(道山)이다. 1633년(인조 11년)에 생
진과에 급제했으나 병자호란으로 강화가 성립되자 도고에 내려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38
세의 젊은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떴으며 뒤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연안(延安) 이씨(李)로 좌
의정 시백(時白)의 딸이며 외아들 지헌(持憲)만을 두었고 조지헌은 명인(命仁), 명형(命亨), 명정(命
禎), 명재(命才)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이 중 조명인은 수원 쪽으로 가고 셋째 조명정은 당숙(조복양의
아들 조지겸)의 계자로 갔다. 둘째 조명형과 넷째 조명재는 온양에 자리 잡았다. 조명형은 아들이 없
어서 사후에 조명재의 둘째 아들 한숙(漢淑)이 계자로 갔으니 온양 지역의 풍양조씨는 실질적으로 조
명재의 후손이 되는 셈이다.
조명재(1677~1732)는 통덕랑에 올랐으며 파평윤씨 진사 윤기(尹耆)의 딸 사이에 한식(漢寔), 한숙
(漢淑), 한철(漢哲), 한덕(漢德), 한일(漢逸), 한길(漢吉) 등 6남을 낳았다. 조한식은 일찍 죽고 조한덕
은 일찍 대가 끊어졌으며 조한일 쪽은 논산 지역을 거쳐 대전과 서울 지역으로 퍼졌다. 조한숙과 조
한길의 후손이 주로 온양 초사동 지역과 송악 일대에 자리 잡고 번창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풍양조씨 재실과 납골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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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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