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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윤치소
尹致昭
<1871. 8. 25 ~ 1944. 2. 20>
아산 출신의 일제 강점기 경제인이다. 본관은 해평(海
平)으로 취동(取東)의 손자이고 한말에 육군 참장(陸軍參
將)을 지낸 영렬(英烈, 1854.4.15~1939.11.4)의 아들이
다.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의 아버지이
다. 1896년(고종 33)에 휘릉참봉(9품)에 제수되었고
1898년에는 사촌형 치호((致昊)와 경성신문을 경영하기
도 했으며 1901년(고종 38)에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
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상업은행 감사를 맡았고 동양
서원을 경영했고 다시 분원자기주식회사 감사를 지냈다.
또한 경성직뉴주식회사 사장으로 있었으며 뒤에 인촌 김
<윤치소의 묘>
성수에게 팔았다. 1920년에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
회 설립을 추진하여 창립 이사가 되었으나 1924년 4월부터 3년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3년간 역임
했다. 뒤에 일본식 성명(창씨개명)을 만들어 이동치소(伊東致昭)라 하였다. 장남 보선 등 6남 3녀를 두었
다. 묘소는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종중 묘역에 있다.
[32] 윤치호
尹致昊
<1865. 1. 23 ~ 1945. 12. 6>
아산 출신의 한말 개화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 정치인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으로 취동(取東)의 손자이
고 군부대신 웅렬(雄烈)의 아들로 아산 둔포에서 출생했다. 호는 좌옹(佐翁)이다. 9세 때 서울로 이주해서
주로 개화파 어윤중(魚允中)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7세 때인 1881년에 조사시찰단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따라갔다가 귀국하지 않고 2년간 머물면서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해 주로 영어 등을 공부했다. 김옥균 등
과 만나면서 그는 귀국 후 개화파의 일원으로 함께 활동하게 된다. 1883년 5월에 초대 주한미국공사 L.
H. 푸트의 통역으로 귀국하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
理交涉通商事務衙門) 주사(主事)가 되었다. 1884년 갑신
정변 당시 맡겨진 외무아문(外務衙門) 참의(參議)직을 거
부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뒤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알렌이
세운 중서서원(中西書院)에 다녔으며 1887년에 세례를
받았다. 이듬해에 알렌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대
학에 다니면서 기독교와 서양학문을 깊이 받아들여, 힘
이 정의라는 사회진화론적 세계관과 미개한 전통사회인
우리나라는 선교와 교육을 통해 국민을 계몽·개조해야
근대사회가 될 수 있다는 근대관을 갖게 되었다.
<윤치호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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