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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에 의해서나 규범을 억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발적인 감정과 주체적 정서
되었고, 7월에 쓰시마(對馬島)로 유배되었다. 거기서 그는 단식으로 저항하다가 11월에 순
에 의해 행할 때 의의가 있다. 부모와 자식의 인격은 동등하며, 자기 인격의 주체에서 서로
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를 대할 때 건강한 효가 된다.
이남규는 1882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ㆍ사간, 사헌부 지평 · 장령 · 집
예산은 충효예 정신의 바탕이 되는 큰 유학자를 많이 배출한 고장이기도 하다. 예산은 오
의, 홍문관 교리 · 응교, 승정원 동부승지 · 우승지 등 청환 요직을 두루 지냈다. 1894년에
래전부터 선비의 학문인 유학의 정신과 예의(禮義) 염치(廉恥)를 핵심으로 하는 학풍이 전
동학혁명이 일어나 일제가 한양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이남규는
匪擾及倭兵入都疏)>를 올려 그에 대한 대비를 주장했다. 그해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민
해 내려오는 곳이고, 예의 정신이 충만한 양반의 고장으로써, 생생한 충효예의 사례가 풍부
한 곳이다. 조익(趙翼)과 김정희(金正喜) 등 대유학자들이 매 시기마다 예산에서 태어나거
씨 정권을 전복하고 친일 정권을 수립하자 를 올려 이를 규탄했다. 다
나 예산에서 학문을 닦은 고장이다. 그동안 예산이 배출하였거나 연관이 있는 대표적인 인
음 해인 1895년 명성황후 시해 만행이 일어나자 선생은
后位號 討賊復讐疏)>를 올려 일제를 규탄했다. 그해 단발령(斷髮令)이 내리자, 이에 반대
물로는 김구(金絿, 1488~1534), 이담(李湛, 1510~1575),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이
산해(李山海, 1539~1609), 조익(趙翼, 1579~1655) 등이 있고, 이외에도 신계영(辛啓榮),
하여 이남규는 당시 재직하던 영흥부사에서 물러나 고향인 충남 예산으로 귀향했다. 이후
이윤(李淪), 박두세(朴斗世), 윤봉구(尹鳳九), 윤봉오(尹鳳五), 이용휴(李用休), 이병휴(李
1896년 안동부 관찰사, 1897년 중추원 의관, 1899년 비서원승 · 궁내부 특진관 · 함경남북
秉休), 이가환(李家煥), 이삼환(李森煥), 성수묵(成遂默) 등 뛰어난 유학자를 많이 배출했
도 안렴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향리에 은거했다.
다. 이들은 학문이나 한 시대를 담당한 예산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외교권과 통치권을 강탈당하자 국망의 상황에서
청토적소(請討賊疏)>를 올려 매국 도적 처단과 일제와 격전을 주장했다. 선생은 이 상소에
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2.예산의충의지사와충의정신
“불의(不義)로존재함은의로움에망하는것만같지못하고,불의로사는것은의로움
예산에는 충의(忠義) 인물이 많이 나온 고장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부
에 죽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하물며 의(義)가 틀림없이 망했는데도 죽지 않고, 불의가
터 나라와 겨레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와 겨레를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예산의 인
틀림없이존재하는데도죽지않겠습니까.엎드려바라건대폐하께서는박제순(朴齊純)무
물 가운데 특히, 한말에 일제에 침략에 맞서 의병을 일으킨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리의매국의죄를다스리시고,원수의나라(일제)가맹약을어긴죄를동맹각국에포고하
1833~1906)과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1855~1907)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시고군신상하가일치단결하여일대결전을벌이게하여주십시오.”
최익현은 예산 광시면 관음리에 묘(충남 기념물 제29호)가 있다. 최익현의 묘는 1907년
에 충남 논산 노성 국도변에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묘를 찾아와 참배하자 일제는 1910년
이러한 강렬한 위정척사 활동으로 이남규는 전국 유림의 신망을 받게 되었다. 최익현은
에 오지인 현재의 이곳으로 묘를 옮겼다. 최익현은 1905년 10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조선
1906년 4월 전북 태인에서 의거하면서 그에게 동참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해 5월 민종식
이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하자, 다음달에 (請討五賊疏)를 올려 늑약 무효를 선
(閔宗植)이 충남 홍산(鴻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탈환하자 의거에 협조를 아끼지
언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박제순 · 이완용 · 이근택 · 이지용 · 권중현 등 오적(五賊)의 처단
않았다. 의병이 일본군에 패하자 의병장 민종식을 피신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관
을 주장했다. 1906년에 최익현은 73세의 나이로 제자인 임병찬(林秉瓚, 1851~1916)과 함
여했다. 이에 일제는 이남규와 장남 이충구(李忠求)를 한 달간 공주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께 전라북도 태인에서 거병했다. 그해 6월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그 뒤 1907년 6월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그해 7월 24일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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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되었고, 7월에 쓰시마(對馬島)로 유배되었다. 거기서 그는 단식으로 저항하다가 11월에 순
에 의해 행할 때 의의가 있다. 부모와 자식의 인격은 동등하며, 자기 인격의 주체에서 서로
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를 대할 때 건강한 효가 된다.
이남규는 1882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ㆍ사간, 사헌부 지평 · 장령 · 집
예산은 충효예 정신의 바탕이 되는 큰 유학자를 많이 배출한 고장이기도 하다. 예산은 오
의, 홍문관 교리 · 응교, 승정원 동부승지 · 우승지 등 청환 요직을 두루 지냈다. 1894년에
래전부터 선비의 학문인 유학의 정신과 예의(禮義) 염치(廉恥)를 핵심으로 하는 학풍이 전
동학혁명이 일어나 일제가 한양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이남규는
匪擾及倭兵入都疏)>를 올려 그에 대한 대비를 주장했다. 그해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민
해 내려오는 곳이고, 예의 정신이 충만한 양반의 고장으로써, 생생한 충효예의 사례가 풍부
한 곳이다. 조익(趙翼)과 김정희(金正喜) 등 대유학자들이 매 시기마다 예산에서 태어나거
씨 정권을 전복하고 친일 정권을 수립하자 를 올려 이를 규탄했다. 다
나 예산에서 학문을 닦은 고장이다. 그동안 예산이 배출하였거나 연관이 있는 대표적인 인
음 해인 1895년 명성황후 시해 만행이 일어나자 선생은
后位號 討賊復讐疏)>를 올려 일제를 규탄했다. 그해 단발령(斷髮令)이 내리자, 이에 반대
물로는 김구(金絿, 1488~1534), 이담(李湛, 1510~1575),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이
산해(李山海, 1539~1609), 조익(趙翼, 1579~1655) 등이 있고, 이외에도 신계영(辛啓榮),
하여 이남규는 당시 재직하던 영흥부사에서 물러나 고향인 충남 예산으로 귀향했다. 이후
이윤(李淪), 박두세(朴斗世), 윤봉구(尹鳳九), 윤봉오(尹鳳五), 이용휴(李用休), 이병휴(李
1896년 안동부 관찰사, 1897년 중추원 의관, 1899년 비서원승 · 궁내부 특진관 · 함경남북
秉休), 이가환(李家煥), 이삼환(李森煥), 성수묵(成遂默) 등 뛰어난 유학자를 많이 배출했
도 안렴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향리에 은거했다.
다. 이들은 학문이나 한 시대를 담당한 예산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외교권과 통치권을 강탈당하자 국망의 상황에서
청토적소(請討賊疏)>를 올려 매국 도적 처단과 일제와 격전을 주장했다. 선생은 이 상소에
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2.예산의충의지사와충의정신
“불의(不義)로존재함은의로움에망하는것만같지못하고,불의로사는것은의로움
예산에는 충의(忠義) 인물이 많이 나온 고장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부
에 죽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하물며 의(義)가 틀림없이 망했는데도 죽지 않고, 불의가
터 나라와 겨레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와 겨레를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예산의 인
틀림없이존재하는데도죽지않겠습니까.엎드려바라건대폐하께서는박제순(朴齊純)무
물 가운데 특히, 한말에 일제에 침략에 맞서 의병을 일으킨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리의매국의죄를다스리시고,원수의나라(일제)가맹약을어긴죄를동맹각국에포고하
1833~1906)과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1855~1907)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시고군신상하가일치단결하여일대결전을벌이게하여주십시오.”
최익현은 예산 광시면 관음리에 묘(충남 기념물 제29호)가 있다. 최익현의 묘는 1907년
에 충남 논산 노성 국도변에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묘를 찾아와 참배하자 일제는 1910년
이러한 강렬한 위정척사 활동으로 이남규는 전국 유림의 신망을 받게 되었다. 최익현은
에 오지인 현재의 이곳으로 묘를 옮겼다. 최익현은 1905년 10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조선
1906년 4월 전북 태인에서 의거하면서 그에게 동참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해 5월 민종식
이 사실상 식민지로 전락하자, 다음달에 (請討五賊疏)를 올려 늑약 무효를 선
(閔宗植)이 충남 홍산(鴻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탈환하자 의거에 협조를 아끼지
언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박제순 · 이완용 · 이근택 · 이지용 · 권중현 등 오적(五賊)의 처단
않았다. 의병이 일본군에 패하자 의병장 민종식을 피신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관
을 주장했다. 1906년에 최익현은 73세의 나이로 제자인 임병찬(林秉瓚, 1851~1916)과 함
여했다. 이에 일제는 이남규와 장남 이충구(李忠求)를 한 달간 공주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께 전라북도 태인에서 거병했다. 그해 6월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그 뒤 1907년 6월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그해 7월 24일
3.선비의고장,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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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뿌리예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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