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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되고 시골로 내려와서 생활한 지 두 해 만에 정유년에는 서용되어
금성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평안병사로 옮겼다.
무술년 겨울에 관찰로 옮기었다. 공은 서쪽 지역의 관찰이 된 것도
세 번이나 되었다. 서쪽 지역의 이해를 분명하게 보고 조금도 빠뜨림
없이 마른 데는 기름을, 시든 데는 깨어남을 베풀어 힘이 못 미칠까
염려하였으나 또한 중산의 상자에 맞춤을 면치 못하였다.
경자년에는 공조참판으로 말미암아 충청감사가 되니 이때 온 나라
가 흉년이 들었으나 충청도가 가장 더해서 갑오년의 충청도 흉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공의 나라 걱정과 백성 사랑은 천성이었다. 여러 차례 굽히고 여러
차례 곤욕을 치뤄 뉘우치거나 혐의하지 않고 흉년 구제의 정사에 마
음을 다해서 범중엄 부필·한기의 남긴 법도를 따랐다. 이로 말미암아
충청도의 백성들은 마침내 구렁에 구른 자가 없었으며 또한 문서로
속이는 것을 막고 돌아왔다. 계묘년에는 호조참판으로 청나라 가는
사신에 충원하였고 돌아옴에 종자 중에 청나라에서 크게 금지하는
석류를 사 온 자가 있어서 공이 이 때문에 해직되었다.
공은 일찍이 두 어버이가 난리 중에 돌아가시어 임시 매장되어 있
음을 밤낮으로 침통하였는데 이제 짐을 벗었으니 그 틈을 타서 곧
대흥에 있는 좋은 언덕으로 옮겼다. 공은 비록 면례하는 길에서도 울
고 애통함을 초상을 만난 자같이 하니 자제와 친척들이 서로 간해도
듣지 않았고 병을 얻어 며칠 안 되어 돌아가니 갑진년 추 7월 22일
이었다. 공이 돌아감을 듣고 사대부는 말할 것도 없으며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 모두 슬퍼하고 아까워함을 마지않았다. 서울이나 지방의
아전들도 모두 이르되 “재주 있고 어진 신하가 없어졌네. 나라가 충
130 예산군지(19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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