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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_1
자암김선생묘지(안응창)
공의 성은 김씨고, 이름은 구며, 자는 대유인데, 광주 사람이다. 자호는 자
암이고, 또 율곡병수를 썼다. 고조의 이름은 소(遡)인데, 성균관사성을 지냈고
의정부좌참찬에 증직되었다. 증조의 이름은 예몽인데, 예조판서를 지냈고 시호
는 문경공(文敬公)으로 당시에 명성을 떨쳤다. 조부의 이름은 성원인데, 성균관
사예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아버지의 이름은 계문인데, 대흥현감
을 지냈고, 승정원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숙부인 전의 이씨인데, 고려
때 태사를 지낸 이도(李棹)의 후손으로, 현감 이겸인(李兼仁)의 따님이시다. 홍
치무신년(1488년)9월29일공을낳았다.
16살에 한성시에 장원급제하고, 20살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장원급제
했으며, 계유년(1513년) 한충방 별시에 제2명으로 급제했다. 급제한 초기에 괴
원(승문원)에 들어갔고, 얼마뒤 옥당으로 옮겼다. 저작과 박사겸기사관을 역임
하고 수찬으로 승진했으며, 승문원교리와 이조좌랑, 성균관전적을 거쳐 지제교
에 선발되었다. 다시 옥당으로 들어와 교리겸주기관이 되고, 승문원교리를 거
쳐 헌납과 공조와 예조, 이조의 정랑을 지냈다. 홍문관교수겸편수관과 예문관
응교를 지내고, 홍문관전한에 이르렀는데, 다시 승문원참교와 사간, 사성, 장악
원을 거쳐 홍문관직제학에 이르렀다. 기묘년(1519년) 승정원 동부승지와 우부
승지를 거쳐 부제학에 올랐지만, 이 해 겨울 사옥(士獄)이 일어나 금오(金吾)에
체포되고, 남해의 절도로 유배를 갔다. 재앙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서도 시주(詩酒)와 가무를 끊지 않고, 위험에 처해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생사궁달(生死窮達)에기뻐하거나슬퍼하지않는자세를볼수있었다.
적거(謫居)한 지 무릇 13년이었는데, 병술년(1526년)과 무자년(1528년)에
각각 아버님과 어머님의 상을 당했다. 신묘년(1531년)에 사면을 받아 임피 현
으로 옮기고, 계사년(1533년)에 석방되어 송추로 돌아왔다. 갑오년(1534년)직
첩을 환수 받고, 뒤늦게 복상하고자 양친의 무덤 곁에 여막을 치고서 밤낮으로
통곡하면서 추세(追稅)의 정을 풀고자 했지만 먼저 병이 들어 끝내 일어나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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