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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풍양조씨 조익
| 趙翼
<1579년(선조12년)~1655년(효종6년)>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고 풍양조씨(豊壤趙氏) 중시조 평장사공 조신혁(趙臣赫)으로부터 10세
(世)이며 아산시 지역, 도고면 도산리의 입향조이다. 현재 초사동에 거주하고 있는 후손 20세(世) 조
명재(趙明載, 72세)씨의 10대조이다.
동지중추부사 조현범(趙賢範)의 현손, 한풍군(漢豊君) 조안국(趙安國)의 증손, 현령 조간(趙侃)의 손
자이다. 아버지는 선공감 첨정 등을 지내고 첨지중추부사에 오른 조영중(趙瑩中)이며 어머니는 해평
윤씨(海平尹氏)로 아산현감을 지낸 윤춘수(尹春壽)의 딸이다.
그는 경기도 광주가 고향이고 서울에서 출생했다. 자는 비경(飛卿)이고 호는 포저(浦渚)·존재(存
齋)다. 퇴계의 제자인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 되었으며, 제자백가와 복서 등을 널리 공부했다. 부인
은 성주현씨(星州玄氏)로 무과 급제 후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현감을 지낸 현덕량(玄德良)의 딸이
임진왜란 중에 음직으로 정포만호(井浦萬戶)가 되고 1602년 문과급제 후 삼사의 여러 관직을 거쳤
다. 1611년(광해군 3)에 김굉필·조광조·이언적·정여창 등의 문묘종사를 주장하다가 정인홍(鄭仁
弘) 등의 반대로 좌천되어 고산도찰방 등 외직에 나갔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 광주로 내려갔다.
1618년(광해군10)에 인목대비가 유폐되고 영창대군이 사사되자 처가가 있는 신창현(도고면 도산
리)로 들어와서 5년여 동안 은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는 이때와 이후 1637년부터 1648년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신창에 살고 있던 권득기(權得己)와 박지계(朴知誡) 그리고 온양의 조상우(趙相禹)
등과 교유하고 강론하는 한편, 여러 제자들을 배출하여 우리 고장의 학문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다시 출사하였고 대동법의 충청도 실시에 기여했다. 1631년에 모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를 한 뒤 대사헌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예조판서로 있던 1636년의 병자호란 당시 강
화도에서 실종된 아버지를 찾느라고 왕을 호종하지 못해 삭직·유배되었으나 효성에서 비롯된 일이
고 뒤에 패잔병을 모아 적과 싸우며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고자 했음이 밝혀져 풀려난 뒤 신창으로 돌
아왔다. 이후 이조판서 등에 제수되었으나 아버지 봉양을 이유로 모두 사양했다. 아버지의 삼년상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중추부영사를 지내다가 1655년(효종 6)에 광주에서 77세로 졸했다. 문효(文孝)라
는 시호가 내려졌고 묘는 예산 신양리에 있다.
그는 성리학에 정통했고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포저집(浦渚集)》
을 남겼다. 개성 숭양서원, 광주(廣
州) 명고서원, 그리고 그를 모시기 위해 1670년에 세운 신창(도고면 도산리)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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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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