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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면희(洪冕熹)·이규갑(李奎甲) 등으로부터 임시정부 수립을 목적하는 국민대회 회원 가입을 권고 받았
고 9월에 서울에서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이 조직한 조선독립대동단(朝鮮獨立大同團)에 가입하였다.
지방단원 모집 담당이 되어 임응철(林應喆)·김재구(金在九)·강경진(姜景鎭) 등을 가입시키고 이들과 함
께 지방 동지의 규합과 군자금 모집 등을 위해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범처벌령(政治犯處罰令)·출판법(出版法)·보안법(保安法)·사기(詐欺) 등으로 징
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했다.
[30] 윤웅렬
尹雄烈
<1840(헌종 6년) ~ 1911>
조선 말기·한말의 무신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아산 입향조 득실(得實)의 손자이고 취동(取東)의
2남 중 장남으로 개화파 치호(致昊)의 아버지다. 1856년(철종 7) 무과에 급제한 뒤 1861년 충청감영중군
겸 공주중군(中軍), 이듬해 북청병마우후토포사(北靑兵馬虞侯討捕使) 등을 거쳐 1878년(고종 15) 통리기
문아문참사·남양부사 등을 지냈다. 1880년 별군관으로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
서 일본 조야 인사들과 접촉했다. 이듬해 함경남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그 해(1881년)에 창설된 이른바
신식군대 별기군(別技軍)에 들어가 정령관을 보좌하는 좌부영관(左副領官)이 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에게 군민(軍民)들의 일본공관 습격 계획을 알려 주고 그도 일본군
의 도움으로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망명했다가 군란이 진압되자 귀국했다. 김옥균 등과 가까이 지내면서
도 개화당에 들어가지는 않았기 때문에 갑신정변(1884) 당시 형조판서를 맡았지만 정변 실패 후 처형되
지 않고 능주(綾州)로 유배되었다가 1894년에 청일전쟁과 김홍집 친일내각 수립 후 풀려났다. 이듬해
(1895년) 제3차 김홍집 내각에서 경무사(警務使)를 거쳐 군부대신(軍部大臣)으로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
이후에 일어난 춘생문(春生門) 사건에 개입했다
가 실패하게 되자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아관
파천(1896. 2) 뒤에 귀국해서 참장군부협판(參
將軍部協辦)을 시작으로 법부협판(法部協辦-차
관)과 군부대신(軍部大臣-장관) 등 요직을 맡았
으며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관직에서 물러나 개
신교 신자가 되었다.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본으로부터 10월 16
일에 남작(男爵) 작위와 공채 2만 5천원을 받았
고 이듬해에 그가 사망하자 작위는 장남 윤치호
에게 승계되었다. 치호(致昊)·치왕(致旺)·치
창(致昌) 등 세 아들을 두었다. 묘소는 아산시
<윤웅렬 묘비>
둔포면 석곡1리 해평 윤씨 종중 묘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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