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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일본어 아산군지
. 우리의 지기우인은 옥균선후의 책을 강구
동정은 삽시간에 전국에 퍼졌다
, 김씨우인회(金氏友人會)를 조직하여 사무실을 교순사(交詢社)에
하기 위해
두고 우선제일 조건으로 시체를 우리나라로 인수할 것을 결의하고 재승 신
(齋勝 新一郞)을 상해에 파견하였다. 강본유지조(岡本柳之助) 사태의 중
일랑
대함을 인식하고 같이 출발하였다
(岡本), 재등(齋藤)가 상해에 도착하자 옥균의 유체는 일단 동
그러나 강본
(和田延次郞)에 의해 수용되었다. 일본으로 환송하고
행의 서생 화전연차랑
자 각국의 관계자들이 공동부두에 나왔으나 아니나 다를까 청국 관헌은 폭
(威遠號)에 탑재하여 자객 홍종우(洪
력으로 이를 탈취하여 청국군함 위원호
)와 함께 조선으로 보낸 후였다. 여기에 이르러 강본(岡本)은 대월(大越)
鐘宇
, 각국 영사의 결의로 옥균의 시체에 대해 참형을 가하
상해영사에 교섭하여
. 또한 김씨 우인회에서는
지 않는다는 희망을 청한 양국의 정부에 보냈다
(大井憲太郞 三宅豹三石井信) 등으로 하여금, 외
대정헌태랑 삼택표삼석정신
. 그 시체는 일본
무성에 대해 김옥균은 일단 일본법권 보호하에 있었던 바
에 돌려보내야 된다고 조선에 교섭할 것을 진언하였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김씨 우인회는 옥균의 시체 혹은 기타의 유물을 회수하는데 실패
(淺草 本願寺)에서 장엄한 추도식을
할 수 없이 빈 유패를 설치 천초 본원사
. 다음 청산(靑山) 묘지에 매장하였다. 도리어 조선으로 보내진 옥균의
거행
4월 14일 양화진(楊花鎭)에서 이를 촌단하고 그 목과 사지를 옥문에
시체는
. 또 그 두수의 왼쪽에는 한자넘는 표말
걸어놓고 나머지는 땅위에 버려졌다
(謀叛大逆不道罪 玉
에 ?모반대역불도죄 옥균 당일양화진두불득시릉지처참
)?라고 적었다.
均 當日楊花鎭頭不得時凌遲處斬
. 그리하여 당시 이홍장(李鴻章)이 홍
그 잔인 무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洪鐘宇)의 신상에 대해 취조상 누를 남기지 않도록 훈령 전문을 보냈
종우
. 또한 축전을 조선국왕에 보내는 등, 재 향권(香淃)의 민영익(閔泳翊)부터
, 또한 조선정부가 종우(鐘宇)의 옥균을 살해한 공로를
같은 축전을 보내고
. 이렇듯 청한 양국이 국제상의 예의를
가상하여 중직과 중상을 내린 것 등
무시한 폭역의 조치는 뼈아프게 우리 국민의 공분을 자극하여 국론은 죽 꿇
. 여기에 있어서 대외 강경파의 동죄론이 되고, 혹은 동학당을 후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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