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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시의 현충사 인근에는 황골이라는 마을이 있는
였던것은배신감에분노한민심을돌아서게하였다.
데 이는 ‘큰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현재는 바로 지척에
충청 내포지역은 한양도성을 향해 진격하는 일본군의 전
대규모공단이들어서서지형이크게바뀌었지만,예전에
략에서 임진왜란 초기에는 직접적인 전선(戰線)을 피하였
는 한적한 농촌마을이었고 행정구역상 염치읍 대동리이
으나, 의주에 있는 조정으로부터 끝없는 군량의 공출에
다. 이곳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아산의 위인 만전당 홍가
시달려야했으며혼란기에더욱기승을부린관료의부패
신의 기념관이 건립되어있고 그의 사당과 묘역이 자리하
함에허리띠를졸라매야했다.
고있다.
또한 전쟁이 장장 7년여 장기화되는 동안에는 명나라로
홍가신(洪可臣 1541~1615)은 조선 중기의 인물로 수원부사,
부터 참전한 군량미와 군마의 말먹이까지 조달해야 하는
개성유수,형조판서등을역임한문신이었다.
고충이매우커서기아와헐벗음에시달렸다.
홍가신의 유허에서 서쪽으로 야트막한 고개 하나를 넘으
임금과 조정의 무책임한 도피와 일본군의 침범과 노략질
면현충사가자리한다.현충사는누구나알다시피임진왜
에 따라, 이에 삶의 터전이 붕괴된 백성들의 민심은 극도
란때왜적으로부터나라를구한이순신장군의사당으로
로흉흉해졌을뿐만아니라전국적으로민란의봉기가속
충무공의발자취와숨결을찾아많은방문객들이찾고또
출하게된다.
온겨레의존숭에부족함이없도록장엄하게조성되어있
다. 임진년으로부터 장장 7년여의 전쟁 참화는 이순신이
그중 부여지역을 기반으로 봉기한 이몽학은 본래 왕실의
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기에 결국 극복할 수 있었다. 한
서얼 출신이다. 그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아
편전쟁으로인해,평범한무장중의한사람으로마칠수
나름의공을세웠으나,이마저도혼탁한조정관료들로부
있었던 수군장수가 우리 민족사에서 역사적 위인으로 추
터인정받지못한데크게격분하게된다.끝내‘부패한나
앙받는계기가된것또한사실이다.
라를뒤엎고새로운왕조를세우자’며농민군을일으켰으
니, 들끓는 민심은 삽시간에 규합되어 600명의 농민군이
홍가신은유학에깊어서책장을넘기고시문을짓는백면
나흘만에5,000명으로불어났다.
서생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겪는 과정에서 홍가신은
이몽학은 속절없이 무너지거나 무책임하게 도망치던 관
나라를 구한 공로가 평가되어 청란공신으로 책봉된 인물
군에비해,자발적으로의병을일으켜서왜군에게치명상
이되었다.
을입혀큰명망을얻고있던홍의장군곽재우,호남의호
선비홍가신이칼을쥐고활을쏘게되는일은,역시충무
랑이김덕령장군을거명하며함께합류하기로하였으며,
공과 같은 시기 임진왜란 때의 일이었다. 당시 홍가신은
명망있던병조판서이덕형까지뜻을같이한다는날조를
홍주(지금의홍성) 목사로재임하고있었다.
퍼뜨려서 세력을 크게 동요시키고 백성들의 호응을 불러
조선개국이래약200년의평화로움은조정을비롯한나
일으켰다.
라 전역에서 안일함을 초래하였고, 미증유의 전란에 온
국토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에 다름 아닌 상황을 맞이하게
홍산을 비롯한 임천, 청양, 대흥의 현감과 군수는 대항은
되었다. 무엇보다도 만백성의 어버이로 군림하던 임금이
커녕 도망치거나 심지어 반군에 투항하는 자도 발생하였
백성들을 도외시하고 야반도주하여 멀리 의주로 피신하
다. 고을을 지날 때마다 농민들은 주먹밥을 나누어 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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