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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순창(淳昌) 조(趙)씨이다. 음서로 관직에 나가 사맹(司猛-오위에 속한 정8품직)과 상의원 주부(尙
衣院主簿-종6품)을 지냈다. 후손들이 사맹공(司猛公)으로 호칭한다. 부친의 묘는 전북 임실에 있으나 모
친(함양 박씨)의 묘는 아산시 송악면 동화리 분토골에 있고 그의 묘는 송악면 동화리 동배골에 있다.
[8] 강정
姜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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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온양에서 출생했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을 도왔다
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우윤(漢城右尹-종2품)을 지냈다. 묘는 아산시
송악면 동화리 배골에 있다.
[9] 강주
<1567(명종22년) ~1650년(효종1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은열공(殷烈公) 민첨(民瞻)의 후손으로 북청판관 자위(自
渭)의 현손이다. 아버지는 효자로 영의정에 추증된 운상(雲祥)이며 어머니는 보성 오(吳)씨 몽룡(夢龍)의
딸이다. 이조참판 첨(籤)의 아우이다. 부인은 안동 김씨로 응서(應瑞)의 딸이다. 회덕 자운리(현재 대전시
대덕구 석봉동)에서 태어나고 거주하였다. 자는 사고(師古), 호는 죽창(竹窓)·채진자(採眞子)다. 1585년
(선조18)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5년(선조28)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세자시강원·홍문관·사헌
부·사간원·병조·예조 등 여러 부서에서 검열·이조 정랑 등을 지냈다. 사헌부 집의로 있던 1604년(선
조37)에 장흥 병영을 옮겨 세우면서 수뢰하였다는 모략을 받아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광해
군 때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인조반정 이후에 다시 출사하여 군기시정·대동찰방·장악원첨정·상의원
정 등을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가 바로 사직하고 충주 가흥강 위에서 우거(寓居)했다. 향년 85세에
졸하였으며, 후에 좌의정에 증직되었다.
효성과 우애가 깊고 시문과 서예에 뛰어났
으며《죽창집(竹窓集)》
을 남겼다. 아산시 송악
면 궁평리 방미에 묘가 있다. 묘역 입구에는
김시국이 짓고 유심이 썼으며 김광욱이 전
(篆)한 신도비가 1654년(효종 5)에 세워졌다.
묘 앞에는 이 고장의 학자이자 그의 맏사위인
시암(時菴) 조상우(趙相禹)가 짓고 그의 아들
이자 당시 호서(충청) 관찰사였던 차남 백년
(栢年)이 쓴 묘표가 있다.
<강주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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