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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감(縣監)과 정랑(正郞)이 모두 승정원 좌승지(承政院 左承旨)로 증직되었다. 이것
은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지석(之晳)은 뒤에 벼슬이 사직령
(司稷令)에 이르렀다.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두었다. 맏아들 광윤(光胤)은 이미 종
손 참봉공(參奉公)의 뒤를 이어 벼슬이 참봉(參奉)이었다. 광진(光震)은 수사(水史)
요 광보(光輔)는 우후(虞侯)요 그 다음은 광우(光宇) 광주(光胄)이다. 그리고 딸은
생원(生員) 홍서하(洪敍夏)에게 시집갔다. 서자는 광세(光世)다. 참봉(參奉-光胤)은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두었다. 맏이는 홍의(弘毅)니 도사(都使)요, 홍저(弘著)는 영
장(營將)이요, 홍서(弘緖)와 홍건(弘健) 그리고 홍유(弘猷)는 광헌(光憲)의 뒤를 이었
고 막내는 홍무(弘武)이다. 딸은 김진수(金震繡)에게 시집갔다. 수사(水使, 光震)의
두 서자는 홍수(弘樹)와 홍재(弘梓)이다. 우후(虞侯-光輔)의 두 아들은 홍규(弘規)와
홍구(弘矩)요, 딸은 박성서(朴聖瑞)에게 시집갔다, 광우(光宇)의 딸은 김한정(金漢
鼎)에게 시집갔다. 광주(光胄)의 두 아들은 홍제(弘濟)와 홍협(弘協)이다. 도사(都
使) 홍의(弘毅)의 두 아들은 만상(萬祥) 언상(彦祥)이다. 영장(營將) 홍저(弘箸)의 한
아들은 봉상(鳳祥)이며 딸은 홍원익(洪元益)에게 시집갔다. 홍서(弘緖)의 두 아들은
운상(雲祥)과 두상(斗祥)이다. 홍건(弘健)의 세 아들 홍유(弘猷)의 두 아들 홍무(弘
茂)의 세 아들은 모두 다 어리다. 이 비석에 글을 새기는 공역이 끝나기는 경자년(顯
宗 元年 1660년) 이었으나 형편이 어려워 세우지 못하다가, 이제 3년 만에야 광진
(光震)이 본도 수군절도사(本道 水軍節度使)가 되어 비로소 무덤 앞 길가에 세우게
되었다. 여러 자손들이 전날 기록에 미처 올리지 못한 이들을 삼가 여기에 기록하였
다. 다만 외손들로 촌수가 먼 분들은 번거로워 싣지 아니한다.
숙종(肅宗) 19년 계유(癸酉) 4월에 세우다.
아산의 神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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