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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은 조선 전기 세종 때의 과학자로 본관은 아산이며 기녀 소생으로 동래현의 관노 출신이
다. 과학적 재능이 있어 제련·축성·농기구·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나서 1423년(세종5)왕의 특명
으로 발탁, 상의원 별좌가 되면서 노예의 신분을 벗었다.
그 후 행사 직이 되고 1432년 중추원사 이천을 도와 간의대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의 제작을
감독하였다. 1433년 호군에 오르고 혼천의 제작에 착수하여 1년 만에 완성하고 이듬해 동활자인
경자자의 결함 보완한 금속활자 갑인자의 주조를 지휘·감독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
각의 자격루를 만들었다.
1437년부터 6년 동안 천체관측용 대·소간의,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고정된 정남
일구, 앙부일구, 주야 겸용의 일성정시의,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자격루의 일
종인 흠경각의 옥루를 제작 완성하고 경상도 채방별감이 되어서 구리·철의 채광·제련을 감독하
였다.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
다. 그 공으로 상호군에 특진되었으나 이듬해 그가 감독 제작한 왕의 가마가 부서져 불경죄로 의금
부에 잡혀가 장형을 받고 파직 당하였다.
장영실이 동래현 관노로 있던 시절의“일화”
일을 마치고 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틈틈이 병기 창고에 들어가 녹슬고 망가진 병
장기와 공구들을 말끔히 정비하여 현감의 신임을 얻었다. 누구라도 고달픈 노비 생
활을 하다보면 틈이 날때마다 편히 쉬고 싶게 마련이다.
그러나 장영실은 스스로 일을 찾아 그것마저도 완벽하게 해냈던 것이다.
이러한 장영실의 행동은 장래를 위해 계산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신분의 벽이
단단하게 앞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오히려 일 자체가 좋아 스
스로 일을 찾아다닌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순간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며 자신의 능력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자 노력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성공도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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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타이딩
A-san of Tid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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