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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어 홍주성 전투(1906년)에 참여했다. 이듬해 8월에 예산 대술 출신의 유생 수당(修堂) 이남규(李南
珪)·충구(忠求) 부자가 의병장 민종식을 숨겨준 죄로 체포되어 압송되는 과정에서 송악 역촌리를 지나가
다가 평촌 냇가에서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는 것을 목격하고 일본군이 떠난 뒤에 그들의 시신을 잘 지켜주
었다고 한다.
[27] 유혁로
兪赫魯
< 1863 ~ 1940 >
한말 개화당(독립당)원이자 친일 대지주·관료로 아산 영인면 출생이다. 다른 이름은 혁로(赫老)이고 아
버지는 하급 무인이던 상오(相五)이다. 일찍이 시세 흐름을 읽고 개화당에 합류하여 1882년(고종 19)에
수신사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무과를 거쳐 무관직에 나간 뒤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의 행동대원으로서 전령 임무를 맡아 통신연락과 정찰 임무를 담당했다. 정변 실패 후 김옥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도주했다. 그곳에서 박영효의 지도하에 유학생 기숙사인 친린의숙(親隣義塾)을 경영
하며 본국에서 파견된 자객들로부터 그들의 신변보호를 담당했다. 1894년말에 박영효가 일본의 도움으
로 귀국할 때 함께 귀국한 것으로 보이며 이듬해인 1895년 부령(副領)을 거쳐 군부 포공 국장(軍部砲工局
長)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이른바 을미사변 당시 일본군과 함께 왕궁에 침입
했다. 이후 일본으로 도주했다가 1906년 통감부 개설 후에 귀국하여 군무아문참의(軍務衙門參議) 등을
역임하고 1907년 평안북도관찰사가 되었다. 1910년 일제의 국권 찬탈과 함께 경기도 참여관이 되었으며
1916년 충청북도지사, 1919년 전라북도지사를 역임했다. 1921년 중추원참의가 된 이후 1940년 사망할
때까지 여러 차례 중임하였다.
[28] 윤영렬
尹英烈
<1854, 4. 15 ~ 1939. 11. 4>
조선 말기·한말의 관료다.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아산 입향조 취동(取東)의 2남 중 차남이다. 군부대
신 웅렬(雄烈)의 아우이고 전 대통령 보선(潽善)의 할아버지다. 1881년(고종 18)에 검서관, 1882년 부사
과·상의원별제·의금부도사, 1883년 장악원주부·감찰, 1891년(고종 28)에 부호군, 1895년(고종 32)
내무아문 참의(3품)·강계부사·연안군수, 1896년 안성군수, 1897년 육군보병 부위(副尉), 1902년 연기
군수·중추원의관, 1904년(고종 41) 육군보병정위(正尉) 등을 거쳤다. 그해 남포군수(藍浦郡守)에 제수되
었으며 도적(유민 혹은 의병)을 토벌하는 도적 집포관(토포사)으로 공을 세웠다. 그 후 1906년(고종 43)에
육군 보병 정령에 이어 육군 참장(陸軍參將)에 임용되었다. 1910년(융희 4)에 종2품에서 정2품으로 가자
(加資)되었다. 그 이후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치오(致旿)·치소(致昭)·치성(致晟)·치병(致昞)·치
명(致明)·치영(致暎) 등 6남 2녀와 보선(潽善) 등 여러 손자를 두었다. 묘는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에 있다.
[29] 윤용주
尹龍周
<884. 1.29~1949. 8.18>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탕정면 동산리 사람이며 주로 서울에서 활동했다. 1919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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