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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안교선
安敎善
< ? ~ 1894. 12. 23 >
아산 출신의 동학(東學) 지도자이며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1880년 이전에 동학에 입도한 것으로 보이
며 아산포(包) 접주로 시작하여 대접주(大接主), 충청도 도접주(都接主) 등을 맡아 충청도 지역 동학 운동
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883년 3월에 손병희·박인호·윤상오·여규덕 등과 함께 충청도
동학 중심 인물들이 충북 단양에 가서 2대 교주 최시형을 만나 여러 가지 문제를 상의했다. 경전 간행에
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1883년 6월에 간행된 경주판 동경대전 발문(跋文)에 충청도 아산 도인 안교선(安
敎善)이 공주 도인 윤상오(尹相五)와 같이 실무를 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박인
호(朴寅浩) 등과 함께 포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온양의 이규호(李圭鎬) 부부도 이 때(1884년) 입도하
였다. 안승관(安承寬)·김정현(金鼎鉉) 등에게도 포교하여 경기도 지역 동학 확산에도 기여했다. 1892년
초부터 시작된 교조신원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1892년 10월 공주 집회와 1893년 3월 보은 집회에서 주
도적인 일을 하였다.
1894년 3월에 전라도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자 내포지역(충남 서북부)에서도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
다. 6월 21일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더욱 격앙되어가는 상황에서 9월 9일에 충청도 도접주로서
흥선대원군의 효유문(曉諭文)을 받았으나 동요되지 않았다. 마침내 9월 18일 기포령(起包令)에 의거해서
10월 1일 경에 신창 지역 접주인 김경삼(金敬三)·곽완(郭玩)·정태영(丁泰榮)·이신교(李信敎)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10월 5일 아산현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 등을 탈취한 뒤 당진을 거쳐 내포지역 동학농민군 집
결지인 서산 여미벌에 합류했다. 그 뒤 당진 승전곡 전투, 신례원 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두고 예산을 점령
한 뒤 삽교를 거쳐 10월 28일(음력) 홍주성을 공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점령에 실패한 뒤 일본군과 관군,
유회군(儒會軍) 연합 세력의 역공과 추격전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그도 결국 체포되었다. 서울까지 끌려
간 그는 12월 23일에 남벌원(南筏院)에서 효수되었다. 그 뒤 자세한 사항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25] 오세라
吳세라
<1875. 12. 25 ~ 1939. 3. 9>
아산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해주 오(吳)씨 부사(府使) 태근의 장녀로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덕뫼에
서 출생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이규풍(李奎豊, 1865~1932)의 부인으로 출가했다. 남편이 독립운동을
위해 1908년경에 집을 나선 뒤에 연로한 시어머니를 지성으로 모시는 한편 자녀들을 엄격하게 양육했다.
일제의 감시와 억압이 심해지자 1922년에 아들 이민호(李敏浩)와 함께 가족이 모두 러시아령 연해주로
가서 남편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1932년에 남편이 숨지자 아들을 따라 중국 북경에 가서 항일 활동을 하
다가 1939년 3월 9일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영인면 월선리에 남편·아들 등 가족과 함께 그의 행적을
기록한 충국순의비와 묘가 있다.
[26] 유진원
兪鎭元
< ? ~ ? >
온양 장존리 출신의 의병이다. 청양 출신 중군(中軍)인 이규태(李圭泰)와 의병장 김복한(金福漢)의 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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