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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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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과집안을바꾼6.25사변
6.25가터진것은그녀의나이17살때였다.
인민군이 보이지 않을 때, 금강 다리를 폭파하는 요란한 포성이 울려 마을 사람들은 ‘분
토굴’이라 불린 폐 금광굴로 피난을 하였다. 17살이던 그녀 역시 과년한 처녀였고 사촌 오
빠가 순경과 교도소 간수로 있던 집안이라서 그녀도 분토굴로 피난하여 같이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분토굴로 피난을 하는데 정작 마을에는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마을 청
년한사람이공산당이되어앞장을섰다.
“그런디 그 사람 아버지하구 할아버지가, 그 공산당 사람을 잘 눌러서 동네 사람덜이 죽
던안했는디,동네는시끄러웠어.피난간사람두늘어났구.”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낮에는 굴에서 피난하고 밤이면 집에 와 자는 사람도 있었
다. 서울 수복 후에는 도망가던 인민군들이 급한 마음에 떼배를 타고 도망가다가 몰살을
당하기도했다.전쟁내내마을이소란했던것이다.
“분투굴이서 애를 난 사람두 있었는디, 우리 어머니는 전쟁 끝나고 얼마 안 있어 병원까
지갔는데두돌아가셨어.”
그녀의 나이 18살에 어머니가 죽었고, 어머니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할머니가 지독한 치
매를 앓다가 1년 만에 죽었다. 전쟁에 젊은이들이 마을을 떠나고 머슴을 두기 어렵게 되자
큰 집과 마을에서 삼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1953년부터 삼밭을 없애고 다음 해부터는 금
강변에수박농사를시작했다.전쟁이마을의농사와가정사를바꿔버린것이다.
동갑내기와동네혼인
그녀의 나이 스물두 살에 동갑인 한마을에 사는 김천수와 혼인하였다. 당시 옥성리에는
한 마을의 결혼을 금하는 풍습이 있었지만, 신랑이 강경에서 여관을 운영하다가 화재로 잃
고,6.25동란에마을로이사온사람이라서별탈없이혼인할수있었다.가족은시할아버
지부부,시부모,시동생으로단촐했고,시댁어른들이온순하여마음고생을하지않았다.
첫딸을 낳고 3일만이 군대에 입대한 신랑은 4년 만에 제대하였다. 이후 살림은 거짓말처
럼 불어 많은 논밭을 살 수 있었다. 2남 4녀 6남매를 길렀지만, 시어머니가 아이들을 잘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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