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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양주조씨 조계신
| 趙季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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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양주조씨(楊州趙氏) 8세(世)로 문강공파 중 참교공파 아산시 지역, 배방읍 장
재리 입향조이다.
그는 조선 초의 문신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숭록대부 영중추원사(종1품)을 지낸 문강공(文剛公) 조
말생(趙末生, 1370~1447)의 현손이며 문과를 거쳐 강원도관찰사와 첨지중추원사를 역임한 조근(趙
瑾)의 증손이고 학문에도 뛰어나고 역시 문과 급제 후 승문원 참교(종3품)에 오른 조중휘(趙仲輝)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종사랑 조광유(趙光裕, ?~?)이고 어머니는 언양김씨(彦陽金氏)로 주부 김중행
(金仲行)의 딸이다.
조계신은 계웅(季雄), 계신(季神), 계령(季靈) 3형제 중 차남이다. 자는 자룡(子龍)이며 관직 등에 관
한 자세한 사항은 확인되지 않으나 집안에서는 사직공(司直公, 또는 사직부군)으로 칭한다. 부인은
경주설씨(慶州 氏)이며 설순보( 舜輔)의 딸이다. 배방읍 세교리에 있는 경주설씨 집안, 즉 처가의
산에 조계신의 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혼인을 계기로 장재리 연화동 지역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
였다. 대략 480년 전의 일이다. 현재 후손이 없어서 정확한 사항은 파악되지 않지만 수 십 년 전까지
는 장재1,2리에 경주설씨 후손이 몇 가구 살았다고 한다. 묘는 고속철도 공사로 인해 원위치에서
100여 미터 위로 옮겨 모셨다.
그는 아들이 없어서 형 조계웅의 둘째아들 조눌(趙訥, 1528~1605)을 계자로 맞아 들였다. 증손자
조이후(趙爾後)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종2품)에 올라 사복시정에 증직된 조눌은 지유(之柔)와 지
강(之剛) 형제를 두었다. 둘째 지강은 고양 벽제에 살던 조계웅(조계신의 형)의 큰 아들 조인(趙
계자로 들어갔으나 지강과 그의 후손이 주로 온양과 천안 유량동 일대에 거주하였다. 조지유는 부사
과를 지냈고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상요(相堯), 상순(相舜), 상우(相禹) 등 3남을 두었다.
그중 셋째인 시암(時菴) 조상우(趙相禹, 1582~1657)는 예학과 의리에 밝았던 학자로서 당대의 학
자들인 잠야 박지계(朴知誡), 포저 조익(趙翼),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신독재 김집(金集), 후천 황종
해(黃宗海) 등과 강론하며 교유했다. 또한 1634년(인조12년)에 배방읍 중리에 정암(靜庵) 조광조와
퇴계(退溪) 이황을 배향하는 정퇴서원(靜退書院)을 세우는 일을 주도하였다. 또한 지극한 효행의 본
을 보였으므로 효종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현종의
1665년 온행(溫幸) 때 아들 이숙(爾
)과 함께 효자 정려가 내려졌으며 1670년(현종11)에 정퇴서원에
추향되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문집《시암집(時庵集)》
7권을 남기기도 하였다.
조상우의 부인은 진주강씨(晉州姜氏)이며 첨지중추부사 죽창 강주(姜
)의 큰딸이다. 이후(爾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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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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