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團)이 1915년에 통합한 비밀결사였다. 만주(滿洲)에 독립군 기지를 세워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 혁명 기
지를 거점으로 적절한 시기에 일제히 봉기하여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비밀·폭동·
암살·명령의 4대 행동 강령을 갖추고 국내 각지에 거점 확보,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 건
설, 의열(義烈) 투쟁으로 총독 처단과 친일 부호 처단 등을 추진하였다.
그는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장두환(張斗煥)·김경태(金敬泰)·임봉주(林鳳柱) 등이 1918년 1월에 친일
파인 아산군 도고면장(道高面長)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할 때 자신의 집을 논의장소로 제공하며 거사를
도왔다. 그러나 박용하를 처단할 때 붙인 처단고시문(處斷告示文)으로 인해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드러남
으로써 모두 경찰에 체포되었다. 공주 감옥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재판 결과 무죄로 석방되었
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는
도고면 석당리에 있다.
[22] 성문영
成文永
<1887. 4. 4 ~ 1961. 3. 23>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도고면 석당리 사람으로 성달영(成達永)의 아우이다. 일제에게 국권
을 빼앗긴 뒤 독립운동에 나서기로 하고 1913년에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뒤에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동지 규합과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에 천안의 장두환(張斗煥) 등이 대한광복회의 이름
으로 1918년 1월에 친일관리인 도고면장(道高面長)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할 때 형 성달영과 함께 이 일
을 도왔다. 당당하게 처단하기 위해 미리 작성해 온 처단고시문(處斷告示文)을 붙였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되어 지도자 박상진(朴尙鎭)이 사형당하고 조직이 와해되었다. 그도 이 때
체포되어 공주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1918년 10월의 공주지방법원을 거쳐 1919년 9월의 경성복심법
원에서 면소 처분을 받고 풀려 나왔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
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묘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있다.
[23] 승일상
承一相·壹相
<1889. 4. 6 ~ 1953. 8. 18>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신창면 읍내리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 아산군 학성면(鶴城面-현
신창면)에 있는 학성산(鶴城山)에 올라가서 인근 주민들과 함께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면사
무소와 보통학교를 차례로 습격하여 파괴하는 등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해 5월 2일 공주
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소요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해서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이 취소되고 징역 6월형을 언도받은 뒤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
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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