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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서는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전통과 특징이 있다.
일제때에 체육활동을 했던 원로들의 말을 구태여 빌리지 않더라도 도민 체육대회에서의 유
별나게 악착스런 온양 체육인들의 분전모습 등을 통하여도 넉넉히 읽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온양인 특유의 기질은 우리 온양이 옛부터 많은 전쟁의 격전지였던 역사성에서도
기인 되겠지만 무엇보다 민족감정에 젖어있던 일제때 온양에서 전국 규모의 체육행사 등이 자
주 열렸고 이럴 때마다 일본인과의 대전 등에서 꼭 무슨일이 있더라도 사력을 다해 일본인을
이겨 억눌린 일제로부터의 압박을 벗어나고파 하는 우리민족의 우월성과 끈기있는 저력 등이
주된 원인이 아니였나 여겨진다.
그러길래 일제때 시행됐던 각종 경기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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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에 창설되어 대전 천
안 태안 등지에서 개최된 전국 도시대항 축구대회에 온양팀
팀이라고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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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영어
의 온양 첫자를 딴 약자임 이 출전만 하면 그대회의 열기는 고조되고 관중들 또한 손에 땀을
쥐게하며 어떠한 이유로든지 진행 심판 응원시설 등에 대하여 미비한 점이 발견되면 지체없
팀이 문제를 제기하거나 시정을 요구하고 따지고 들게 마련이다
이로 인해 경기장은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심할 때는 경기가 중단되기도 하며 그럴 때마다
대회 본부석엔 온통 온양인들로 꽉차게 마련이다.
전통적으로 온양은 축구팀들이 많았고 축구기술 발전도 대단하였으며 축구경기도 빈번히 개
최 되었다.
특히 축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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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서울에서 이사온 남궁현과 이북 함경도에서 피난온 이일선 별명이 두
둠바리
축구선수였음 이 체육활동에 헌신하고 있는 이정진 이택상 등을 방문 온양축구의
재건을 건의하였고 그들이 헌신적으로 축구팀 육성을 다짐하기에 이르자 이들이 중심이 되어
팀이란 축구팀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김수묵 이주진 이승구 등
15
명이 온양 축구
팀을 조직하고
, 6 25
동란 직전까지 전국 각종대회에 출전 우승 또는 준우승 등 번번이 상위권
입상을 하여 충남 도내에서는 강력한 팀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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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에 얽힌 비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한번은
1948
년 인근지역 천안의 천안농업학교 구장에서 벌어진 제 회 충남도내 시 군 대
2
항 축구대회에 출전하여
9
타 시군팀들이 온양팀 타도의 공동 작전들을 펴고 나왔다.
경기결과는 최후 결승전에 온양팀과 전의팀이 대결하게 되었다 그런데 전의팀은 서울에서
직업선수까지 고용 순수한 전의인으로 구성된 팀이 아닌 혼성팀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실력도
만만치 않은데 천안팀 관계자들을 통하여 우리 온양팀에게 이번 대회만은 온양팀이 의도적으
로 패해줘서 전의팀이 우승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협상이 들어왔다.
이유는 많은 경비를 들여 출전한 전의팀이 패하고 돌아가면 면민들을 대할 면목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옛부터 승부욕에 남달리 강한 온양팀들이 양보할리는 만무하다 천안팀으로부터 협
상을 통해 받은 제의를 온양팀이 거절할 것은 뻔한 이치이다.
이 과정에서 특히 온양팀 선수중 가장 나이어린 이승구가 앞장서 거절하는 바람에 이때 화
가 치밀은 천안과 전의팀들이 행패섞인 시비로 이승구는 혼줄이 났고 끝내 결승전 경기는 중
단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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