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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018
제52호
제52호
지역학 칼럼
예산학 특강 - 秋史 美感의 現代化 可能性 考察
만년의 작품일수록 더욱 진하게 나타난다. 다시 말해 제주도 유배 이후의 추사의 글씨는 ‘기중득진
특징이자 가장 큰 매력으로 작용된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기(奇中得眞期)’라 할 수 있겠다.
1. 추사체의 특질과 근대적 성격
추사체는 실사구시의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종래의 누습(陋習)을 완전히 씻어내고 서예미를 새롭
4.추사서예의예술성과미학적특징
게 해석하여 현대적 미술개념인 추함까지 구사한 서체이다. 즉 추사체는 청조의 금석학을 완전 소
화한 바탕위에서 조선 글씨를 주체적으로 해석하고(眞興二碑攷) 그 실체적 의미를 구현한 서체이
추사글씨의 특징에 대해서는 험괴(險怪)와 창신(創新)이라는 말로 요약되고 있지만, 세부적으로
다. 다시 말하여 추사체는 우리문화의 풍토와 체질에서 우러나온 고유한 미감과 시대적 감각을 호
분석할 요소는 참으로 많다. 우선 그 배경을 다시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흡하여 독창적으로 승화한 서체이다. 조선 서예가 중국 중심의 아류와 모방에서 벗어나 고유성과
첫째, 추사체가 형성될 시기는 개인적으로는 생애의 부침(浮沈, 시세나 세력 등이 성했다 쇠했다
국제성을 띤 서예로 그 위상을 변모시킨 서체가 추사체이다. 추사의 작가적 태도는 과거 사류(士類)
함)이 거듭된 시기였지만, 국가적으로는 영·정조 이후 문화적 르네상스 시대의 후속이자 역사상 전
들이 서예를 여기(餘技)의 한묵(翰墨)으로 바라보던 관념에서 탈피하여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전 생
례없는 평화시기였다. 때문에 물질적 풍요와 제도적 발전, 그리고 사상과 종교의 새로운 움직임에
애를 걸고 대결한 프로의 태도였다.
힘입어 예술과 문학 부분의 창조성이 제고되는 등 시대적 특수성이 추사예술의 외곽을 싸고 있었
추사는 서예속에서 살고 서예속에서 죽은 진정한 프로였으며 전 생애를 관통하여 서예를 생각한
다. 따라서 추사는 그러한 시츄에이션(상황, 상태)속에서 ‘연행(燕行)과 북학(北學, 영조 정조대 이
최고의 서예가였다. 추사예술의 사상과 정신은 ‘근도핵예(根道核藝, 도에 뿌리를 두고 예술의 열매
후 淸나라의 학술과 문물을 배우려 한 조선 학자들의 학문적 경향)이라는 활력의 내원(來源)’을 얻
를 맺는다. 漢代의 北海相敬君碑에 새겨진 비문이다.)’사상이고, 작품속에서 추구하고 있는 미학은
을 수 있었다.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이다. 청조문화의 수용은 추사에게 체(體)가 아닌 용(用)으로서 방법
그러한 활력의 내원은 추사로 하여금 다양한 문화와 예술을 흡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적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하여, ‘국제성과 개방성’이라는 무대의 공간적 넓이를 제공받게 됨으로써 통안통고(通眼通高)의 세
추사는 작품의 서체 면에서 예서와 행서를 가장 많이 남겼다. 작품의 형식면은 큰 글씨로 쓴 것은
계에 당도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이 그의 예술적 성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서
현판류와 대련이 많고, 작은 글씨로 쓴 것은 소품 간독류가 많다. 대련은 전부 행서와 예서로 된 대
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자(大字)가 본문을 이루며 좌우 양쪽의 협서가 장법상 조화를 돕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예: 畵法有
둘째, 추사는 경학(經學)의 통유(通儒)로서 도교와 불학(佛學)을 통한 동선(通禪)의 선지(禪旨)
長江萬里, 書法有孤松一枝, 간송미술관/ ‘好古’와 ‘硏經’, 호암미술관) 현판류는 거의 예서인데 글
도 꿰뚫었고 실사구시의 실학까지 겸비한 시대의 거벽(巨擘, 어떤 분야에서 그 기능이나 능력이 남
씨가 큰 작품일수록 기굴한 조형미가 신수(神髓)를 얻고 있다. 이런 형식은 작가의 의지나 조형미를
달리 뛰어난 사람)이다. 그가 지닌 거대한 ‘사유(思惟)의 늪’은 추사 학예사상의 핵심세계가 된다. 거
시원한 필세로 펼치기에는 아주 좋은 작품 형태이기 때문이다.(예: 崇海深遊天戱海, 호암미술관/
기에 다시 비학(碑學)이론과 훈고학, 금석고증학 등 청조(淸朝)의 학문사조에 정통하여 역사인식과
殘書頑石樓, 개인소장/ 一爐香室, 일지암/ 无量壽閣, 대둔사) 대련형식은 조선의 좌식(座式) 가옥
학문의 시대정신을 읽어내고 그것을 그의 글씨 속에 깊이 투영한 인물이다. 19세기 조선을 대표하
구조상 자하(자하)와 추사 이전에는 잘 볼 수 없었던 양식이었으나, 의자생활 중심의 중국문물을
는 문화의 종장(宗匠, 경학에 밝고 글을 잘 짓는 사람)은 그래서 태어났다.
견문한 두 사람에 의해 유행되기 시작했다. 잔글씨의 소품 간독류도 추사로 인해 그 시대 유행된
셋째, 인생 노년기에 두 번에 걸친 유배생활
작품형식인데 서체는 대부분 행서이다. 추사의 행서는 구양순을 배우고 저수량을 숭배한 필조(筆調
66세부터 67세까지 2년간 북청 유배(1851-1853)>은 추사에게 삶의 모진 시련을 겪게 하였지만, 그
)인데, 북비(北碑)의 필세를 이입한 행기(行氣)있는 용필은 굳세며 거침이 없다. 결구는 촘촘한 것은
기간은 도리어 추사로 하여금 인생과 예술의 깊이에서 ‘완결을 위한 절대고독의 시간“으로 활용된
더 조이고 성긴 것은 더 넓혀 소밀취산(疏密聚散)함이 자유자재하다. 글씨의 수획(垂劃)이 왼쪽으
시간이었다. 이러한 시기가 있었기에 추사글씨가 불멸의 예술로 남을 수 있는 요인을 갖추게 된 것
로 기우는 측세를 취하고, 행간도 아래로 내려올수록 왼쪽으로 자꾸만 쏠리는 경향이 자주 나타난
이다. 예술은 극적인 배경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깊이가 있고, 내용이 풍부하며 흥미와 관심을 끌
다. 그런 필벽(筆癖)은 신체상의 특징이나 서사(書寫)자세에서 초래될 수 있는 상황이다. 추사는 예
수 있다. 추사예술에는 바로 그러한 극적요소가 고루 갖추어 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추사예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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