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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원정을 말미암아 다시 홍문관에 들어와 응교, 전한 과 직제학이 되어서 항
상 예문관 응교와 성균관사성을 겸하였다. 호당에 사가하고 승정원동부승지에
올랐다가좌승지로옮기고부제학으로배수하였다.
잠깐 있다가 북문에 화가 일어나니 곧 기묘년 11월 15일이었다. 공은 정암,
충암으로 더불어 하룻밤에 모두 내려 취조하였다. 이보다 앞서 남곤, 심정이 공
의에 버리는 바가 되어서 적노감정을 드러내어 몰래 역적이라고 모함해서 일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대신 정광필이 힘써 구함을 힘입어 나누어 귀양 감에 차등
을 두어 귀양 보냈는데 공은 개령으로 장류되었다. 몇 달을 지내고 죄가 더하여
져 남해로 쫓겨갔다. 정암, 충암은 사형의 명을 면치 못하였다. 오호라! 가히 통
곡할 뿐이다. 선비는 진실로 충성을 다하고 도를 곧게 함이 있으니 나아가 밝은
임금에착함을좋아하고학문을좋아하는이를만나지못하고물러나홀로그몸
을착하게하고액곤으로세상에몰하는것이다.
만일 공같은 이는 충성이 족히 써 임금의 알아줌을 맺을만하되 성명한 세상
에서 내쳐졌고 밝음이 족히 써 그 몸을 보호할 수 있었지만 마침내 모리배의 함
정을만났으니이또한어찌하리오?
슬프도다! 하늘의 도를 기피할수 없음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도다. 공이 절
도에 처한지 13년에 비로소 임피로 옮기고 또 2년에 향리에 방환 되었다. 그 적
소에있으매부모가모두먼저죽어이에이르러부모의묘에달려가곡하였다.
쓰러졌다. 다시 소생해 추후에 죄를 벗고자 하는 감정이 조석으로 무덤에 올라
눈물을 흘린 곳에 초목이 모두 말랐다. 가정(1534년) 갑오년 11월 16일에 병들
어 일어나지 못했으니 향년 47세이었다. 예산 종경리 자좌 오향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선세 산소에 따른 것이었다. 그후 57년에 이르러 선조묘에서 특별히 이
조참판에추증되었다.
공의 문장은 기이하면서도 높지 아니하고 위진에서 나왔으면서도 겉으로 예
능에 미쳐서 음율을 알아서 악정을 배수하여서는 명하여 아악을 바르게 하고자
하였다.
16세에한성시에장원했으며20세에사마시에급제하고26세에문과에급제
했다. 사마시에 응할 적에 선정 김모재가 시관이 되었는데 자주 감탄하고 칭찬
을 가하여 그 시권에 비답하여 이르길“한퇴지의 지음이요, 왕희지의 글이다.”
하고서 드디어 발탁해서 두 장원으로 뽑았는데 국조에서 드문 바이었다. 필법이
강건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으며 세상이 인수체라 일컬었으니 대개 공이 인
124│묵향의본향에서조선4대명필자암김구를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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