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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창하게 되었다. 선장에 살던 그의 7세손 정건섭(丁建燮, 일명 정태영丁泰榮)과 8세손 정규희(丁奎
熙, 일명 정수길丁壽吉)가 동학혁명과 항일민족운동에 참여하여 이름을 남겼다. 후손들은 주로 선장 일
대에 퍼져 살고 있다.
정도성과 그 후손의 묘는 주로 도고면 신언리 노래골에 있었으나 그의 묘를 포함하여 여러 묘는 화
장을 해서 정리했다.
[132] 온양정씨 정보천
| 鄭普天 < ? ~ ? >
온양정씨의 시조는 고려 중기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냈다고 전해
지는 정희공(貞僖公, 貞禧公) 정보천(鄭普天)이다. 집안에서는 그를 아산시 지역 입향조로 보고 있다.
그의 선계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첫째는 후삼국 통일전쟁 시기의 이
야기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유금필(庾黔弼) 장군에게 명하여 탕정군(湯井郡-온양)에 성(복부성-배
방산성)을 쌓을 때 온양 지역의 토착 호족이었던 정보천의 선조가 감독을 맡아 성을 잘 쌓은 공으로
호장(戶長) 벼슬을 주고 이후 자손이 대대로 온양(온수)의 호장을 맡도록 한 것이 온양정씨의 시초라
고 본다. 두 번째는 온양정씨가 경주정씨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이다. 경주정씨의 도시조(都始祖)는
진지부(珍支部) 촌장 지백호(智伯虎)이다. 정보천은 지백호의 34세손이며 신라 하대의 장군으로 장
보고와 함께 활약한 정년(鄭年, 連)의 7세손이라고 한다.
집안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정보천은 상향(桑鄕-桑梓之鄕-조상들의 묘가 있는 곳)에서 졸했다고
한다. 묘소는 온양군 남면 백악동(白岳洞-현재의 송악면 동화2리 배골)에 있었으나 세월이 흘러 실
전되었다. 또한 고려 말 이후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문서들이 소실되어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고
한다. 1947년에 온양 읍내리(온주동)에 단을 세워 제향을 올리다가 1973년에 영인면 월선리에 모선
사를 짓고 정보천부터 11세(世) 소윤공(少尹公) 정순우(鄭淳祐)까지 함께 모시고 있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후손들의 직계 선조로서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인물 중에는 선무랑 정수(鄭穗)
와 이조정랑 정충근(鄭忠根)이 있다.
정수(鄭穗, ?~?)는 조선초기의 인물로 온양정씨 13세(世)이며 소윤공파 중 삼등공파(三登公派) 온
양 신인동 전의실로 낙향하였다. 증조부는 정년(鄭年), 조부는 소윤공 정순우이다. 아버지는 삼등현
령과 보문각학사를 역임한 정득진(鄭得珍)이다. 집안의 기록에는 정득진이 두문동 사건 때 순절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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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입향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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