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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박정양
朴貞陽
<1895. 1. 12 ~ 1935. 4. 23>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배방면 장재리에서 출생했으며 1924년 9월 초에 만주 대한통의부(大
韓統義府)의 국내지부를 결성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대한통의부는 1922년 서간도 지역의 독립군
단체인 한족회(韓族會)·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대한통
군부(大韓統軍府)가 확대 발전하여 서간도 일대의 통합 투쟁단체로 조직된 독립군 단체였다. 서간도를 비
롯한 만주지역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대한통의부
외무위원장 현익철(玄益哲)이 국내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파견한 특파원과 뜻을 모아 대한통의부 경성지
부를 결성하고 동지 규합에 힘을 쏟아 홍경식(洪景植)·이병욱(李丙旭)·유한기(柳漢基) 등을 경성지부
요원으로 확보했다. 또한 그는 주로 서울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24년 체포되어 징
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17] 서몽조
徐夢祚·蒙祚
<1881. 12. 24 ~ 1954. 5. 25>
아산 출신의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선장면 돈포리 사람으로 1919년 4월 4일 선장면(仙掌面) 장터에서
정수길(丁壽吉)·임천근(林千根)·오상근(吳相根)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시위군중에
앞장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200여 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주재소에 쳐들어가서 기물을 파괴하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이 해 6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8] 서병림
徐丙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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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출신의 의병으로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온양 사람인 그는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거병(擧
兵)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7년 7월에 고종황제가 퇴위당하고 정미7조약 체결에 이어 8월
에 군대까지 강제 해산되자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온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온양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그 후 10월에 의병 수십 명을 이끌고 충북 제천으로 가서 이강년(李康秊)의 의병진에 합류했다.
이강년 부대는 김상태(金尙台)를 비롯한 백남규(白南奎)·변학기(邊鶴基)·성익현(成益鉉)·김운선(金雲
仙) 등 유능한 해산군인이 합류한 대부대였다. 강원도 낭천(狼川;화천)·인제(麟蹄)에서 경상도 안동(安
東)·영양(英陽)에 이르기까지 주로 태백산맥을 넘나들며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는 이강년 의진(義陣)에
참여한 이후 충남 온양과 충북 제천 일대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에 걸쳐 교전을 벌여 혁혁한 전과를 거
두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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