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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잊혀진시간을말하다3
인데 소금을 굽지 않아 폐허가 된 곳이었다. 순 모래땅이었다. 그곳에 흙벽돌로 부엌 1칸과
방2칸의소위‘말집’(마루가없이방과부엌만1줄로있는집.마루가없어말키우는축사와같다고해서말집
이라고부른다.)을짓고살았다.흙벽돌은황토에볏짚을썰어넣고반죽하여틀로찍어낸것으
로건물의앞면에만몇개의기둥을세우고벽체를흙벽돌로쌓는다.지붕은일반초가집과
같이들보에서까래를얹는다.
벗뚝거리에는 좋은 샘이 없었다. 땅을 파면 짠물이 나와 빨래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먹는 물은 삼현리쪽, 논 가운데에 옹달샘에서 떠다 먹었다. 논에 있는 샘이기 때문에 거머
리,개구리어떤때는뱀도들어있었다.또‘도깨비터’라밤이면쨍그랑쨍그랑하는소리,담
이 무너지는 소리도 났다. 먼저 살던 사람들도 들었다고 하는데, 김호준 씨의 아내도 소리
를 들었다. 그러다 아침에 보면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도깨비터이기 때문에
나는소리라고하였다.사람들은도깨비와맞는사람이거주하면부자가되지만,그렇지않
으면떠나야한다고하였다.
벗뚝거리는 물도 나쁘고, 여러 가지로 불편하였다. 4집이 살았는데 점차 큰 마을로 모두
이주하였다. 김호준 씨도 1978년도에 큰 마을인 삼상마을로 이주하였다. 현재 벗뚝거리는
모두논이되었다.
삼현리에서의 삶은 고단했다. 아직 간척지가 다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남의 소작논
도 없었다. 어머니가 생선을 사 큰 대야에 담아 머리에 이고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팔아 생
활하였다. 겨울에는 옷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어머니는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많은 아
이들을키우느라고생이많았는데,아버지는선비처럼사느라생활에도움을주지못했다.
김호준 씨는 35세에 서천군 비인면 칠지리에 사는 이씨댁 처녀와 결혼하였다. 같은 벗뚝
거리에사는칠지리출신유씨가중매했는데당시신부는26세였다.신혼초에바로상경하
였는데 특별한 기술이 없어 공사장에서 잡일을 하였다. 서울생활 6년 후, 부모님과 가족들
이있는삼현리로내려왔다.장남으로서의책임이었다.
김호준 씨는 보령에서도 공사현장을 전전하였고, 아내는 채소장사를 하였다. 남의 밭을
빌려참외와각종채소를심어대천장에내다팔았다.36호도로가있는염전입구까지머리
에이고가서버스를타고다녔다.남들은조잠마을앞바다에서바지락,굴등해산물을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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