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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면 강당리에는 강당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원래 서원이였다고 한다 이 서원에서
유생들이 밤낮없이 글읽는 소리가 이 골짜기를 퍼져 흘렀으며 이로 인해 강당골이라는 명칭
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대원군이 정권을 잡았을 당시 서원을 철폐했던 이링 있다 그 때
나라에서 보낸 군졸들이 강당리에 있는 서원을 철폐하려고 폐했던 일이 있다 그 때 나라에
서 보낸 군졸드링 강당리에 있는 서원을 철폐하려고 내려올 때 서원에 있던 유생들이 광덕
사에 있는 부처님을 모셔다 놓고 머리를 깎은 다음 목탁을 두드리며 임시직이나마 스님을
흉내를 낸 것이다 군졸들은 모두 돌아가고 난 다음에도 서원은 되돌아오지 않고 그냥 절로
정착하여 현재 강당골에 있는 강당사가 되었다고 한다 강당사 부근에는 노송과 맑은 시냇
물이 흘러 경치 좋기로 유명하며 많은 관광객들이 여름이 되면 항상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
요즈음은 절보다 부근의 골짜기 경치가 좋아 유생들의 글읽은 소리 못지않게 경치의 아름다
움이 멀리멀리 울려 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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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면 평촌리 하쟁이라는 마을 뒤에 큰 산이 있는데 그 산꼭데기에 커다란 바위가 아랫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고 그 바위 밑으로 큰 골이 있다 이 골을 이곳에서는 도둑골이라 불
러 내려오고 있다 이 도둑골은 깊고 긴 골로서 양쪽에는 큰 절벽이요 바위와 나무가 울창
해서 낮에도 컴컴하고 무서운 마음이 들어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싫어한다 그런데 그 골은
한참 올라가면 중터겡 넓고 편편한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도둑들이 소를 훔쳐다 잡아먹고
팔기도 하며 또한 도둑들이 모여서 남의 것을 훔칠 상의도 하는 곳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옛날에 흉년이 들면 도둑들이 이곳에서 쌀이며 옷이며 훔쳐다가 숨겨두고 살았으며 이 근동
의 소는 전부 도둑을 맞았어도 소의 거처를 찾지 못할 정도로 도둑들이 생활하기가 안성맞
춤의 곳이였다 한다
동란 때에도 마을 사람들이 인민군을 피해서 이곳에 소를 끌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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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숨어살 정도로 피난처이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곳을 도둑골이라고불러
오고 있다 도둑골 과히 아름다운 이름은 아니다 때도 변했으니 피난골도 좋겠지만 그보다
차라리 신선골로 바뀌었으면 어떨지
바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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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면 유곡리
정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베틀 형태의 방
1
1.5km
위가 있다 이 바위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 하자면 큰 전단이 있었던 그 당시 이 마을에는
극히 초라한 아낙네가 베를 짜고 있었으니 그 원인인즉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남편을
전쟁에 내보내고 그나마 어려운 살림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아낙네의 고역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오직 한가닥 남편과의 재회를 믿으며 궁색한 살림을 꾸려나갔으니 이렇
게 횟수를 더하는 동안 전쟁의 열도 점점 식어 갔다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는 여인의 애탐
은 여러해를 거듭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를수록 아낙네의 희망은 한꺼풀씩 거져 갔으며 이
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를 가름할 수 없는 지경에도 아낙네는 남편의 생조만을 믿으며
온 정성을 다해 불공까지 드렸다 하지만 세월은 아낙네의 머리를 백발로 덮었으며 이 풀
수 없는 한을 베틀에 담아져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바위로 변했다 이 바위가 베틀과 흡사
해 베틀 바위라 청하는 사람도 있고 그 정기를 받아 그 주위의 마을명이 베틀 조작품의 이
르밍 되었으니 이 아낙네의 모든 정성과 남편에 대한 만날 수 없는 한의 표상이라고 전해
내려 온다 베틀에 한을 풀어 세월을 보낸던 한 여인의 인종의 미는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
운 수를 놓으며 짠 한폭의 비단이라고나 할까
봉곡사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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