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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시보령의바다
였는데, 김씨 집안에서 품삯과 먹거리를 챙겨주어 늘 고맙게 생각하다 훗날 큰 부자가 된
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김화식 선생의 삼촌을 마름으로 고용해주었다. 이런 연유로 김화식
선생이 타작관을 하기도 하였다. 벼를 벨 때나 탈곡을 할 때는 얼마의 수확이 나오는지 지
주를 대리하는 사람을 ‘타작본다’라고 하였다. 타작을 보러 나가면 소작 짓는 집에서 대우
도좋았고품삯도좋았으나15일정도만할수있는일이었다.
김화식 선생은 마름인 삼촌 덕택으로 물 좋은 이석구씨 논을 소작하였다. 당시 소작료는
1/2이었다.광복후에는잠시1/3이었다가토지개혁으로그땅을분배받게되었다.
김화식선생은김호준씨8살때돌아가셨는데손자들에게항일운동에관한이야기는하
지 않았다. 다만 아들(김창진)에게, 중국 북간도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동안 의암선생이 전쟁
이 끝나지 않을것 같으니 너는 고향으로 돌아가 조상을 모시라고 해서 돌아왔다는 이야기
를전했다고한다.
김호준 씨는 김화식 선생과 관련된 문서를 가지고 있었다. 집안에 여러차례 화재가 나 소
실되고남은약간의기록이다.이것들은훗날종증손인김범식에게전해주어후손임을입증
하는데사용하였다.
김호준 씨의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김호준 씨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오직 가학으로 한
문만가르쳤고,할아버지가돌아가신뒤에집안일,농사일을하였다.김화식선생의묘는청
소면 신송리에 모셨다가 김호준 씨 큰아버지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방축리 선산으로 모
셨다.
김호준 씨의 아버지(김창진; 김화식 선생의 둘째아들)는 토지개혁으로 분배받은 좋은 논 10여
마지기를 어쩌다 잃고, 살기 어려워져 1961년 당진군 합덕면 구양리로 이주하여 간척지 농
사를지었는데해일이일어나실패했다.다시고향인청소면진죽리뱀굴로돌아왔다가5개
월후에남포면삼현리로이사하였다.간척지를막는다는소문을듣고돈한푼없이대가족
을 이끌고 이사 온 것이다. 당시 가족은 김호준 씨의 할머니(김화식의 부인)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간인 6남매(5남1녀)와 조카들이었다. 삼현리에는 김호준 씨의 작은아버지도 이사 와 벗
뚝거리동쪽갯장벌에집을짓고목수일을하였다.
삼현리에서 처음 정착한 곳은 벗뚝거리였다. 벗뚝거리는 과거 소금을 굽던 ‘벗’이 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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